한국유학사 최고 문장가 최치원 제향, 정읍 무성서원

입력 : 2020-03-10 23:04 수정 : 2020-03-28 13:21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6)마을 속의 흥학(興學)운동, 무성서원

신라말 지역 선비들 생사당 건립

조선시대 정극인의 향학당과 합쳐져 1696년 무성서원이라는 사액 받아

치적 이룬 지방관·흥학 활동 사림 기려 대원군 시절 서원 철폐 때도 살아남아

구한말 을사늑약 통감정치에 맞서 최익현·임병찬 의병 일으킨 거점
 


무성서원은 1615년에 건립됐고 주 제향인물은 신라말 고운 최치원(857~?)이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들과 달리 이례적으로 향촌 내에, 그것도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로 가 유학하며 빈공과에 합격하고 관직까지 지내면서 필명을 날렸다. 885년, 17년 만에 귀국해 당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과거제도를 비롯한 국가행정 전반에 개혁을 건의했다. 그러나 골품제의 폐쇄성에 부딪쳐 한계를 느끼고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며 외직을 자청해 부임한 곳이 바로 지금의 정읍시 태인면 일대인 태산군이다.

8년 동안 백성을 중심으로 선정을 베풀고 마을에 흥학운동을 일으킨 치적을 기려 그가 떠날 때에 최치원을 위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극인(1401~1481년)이 마련한 ‘향학당(鄕學堂)’과 합쳐져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으면서 ‘태산사’라 이름했다.

그 후 태인지역에서 현감을 지낸 신잠(1491~1554년)이 4방에 학당을 설치해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신잠이 이임하자 고을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최치원의 경우처럼 생사당을 세워 그의 공적을 기렸다. 이후 고운 최치원 등을 모신 태산사와 향학 진흥에 공이 컸던 신잠의 생사당을 합사해 무성서원으로 발전시켰다.

무성서원은 전북의 수서원 역할을 해왔던 대표적 서원으로, 지방관으로 부임해 치적을 이뤘던 인물과 흥학활동을 펼쳤던 지역 사림들을 제향한 서원이다. 1696년에 무성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무성서원 사액 현판과 현가루(絃歌樓)의 현판은 이 서원의 독특한 유래와 의미를 상징한다. 무성(武城)은 신라시대 태인지역의 지명이기도 하지만, 공자의 제자 자유(子遊)가 다스렸던 지역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논어> ‘양화’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공자가 무성에 가서 음악소리를 들으셨다”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서원이 예악(禮樂)을 일으켜 백성과 가깝게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문루의 명칭도 현가지성의 고사를 참조해 현가루라 한 것은 공자의 교화사상을 나타낸다.

마당에 들어서면 무성서원 현판이 있는 강당이 마주하고 뒤에 사당인 태산사가 있다. 내부에는 최치원을 비롯한 7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강학구역은 서원 중심부에 있는 강당과 함께 동쪽 담장 밖으로 동재인 강수재(講修齋)가 있다.

무성서원이 역사와 문화사에서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 최치원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무성서원이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서 면할 수 있었던 연유도 최치원이라는 제향인물 때문이다. 최치원은 1020년(고려 현종 11년)에 설총에 이어 두번째로 문묘에 배향됐다. 한국유학사에서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은 신라말 학자로서 또 관리로서 역할을 하면서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최치원은 한국의 전통사상인 풍류에 기반을 두고 유·불·선(儒佛仙)을 융합해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사회 통합의 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이다. 무성서원을 찾는 인사들은 최치원의 행적을 기리는 글을 많이 남겼고, 무성서원에 최치원의 영정 봉안과 그의 시문집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보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성서원은 구한말 병오의병(丙午義兵)으로도 유명하다. 1906년 병오년에 최익현(1833~1906년)과 임병찬(1851~1916년)의 창의거점이 바로 이곳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으로 굴욕적인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최익현과 임병찬은 1906년 6월4일 무성서원에 모여 강회를 연 후 의병을 일으켰다. 80여명의 의병들과 함께 격문을 돌리고 태인·정읍·순창·곡성을 점령했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등 13명이 서울로 압송됐다. 다시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됐는데 단식으로 저항하다 순국했다.

이를 기념하는 병오창의비가 강수재 앞에 세워져 있다. 병오창의·무성창의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무성서원의 정신사적 위상과 지성사적 전통을 잘 보여준다. 최익현의 의병창의가 무성서원의 강회와 유림 동원력, 대표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배용 교수는…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 ▲영산대학교 석좌교수 ▲<농민신문> 편집자문위원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 전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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