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후의 팔팔구구] 아이의 소꿉놀이와 어른의 살림살이

입력 : 2022-08-03 00:00

어릴적에 소꿉장난하던 친구

‘제이에게’ 노래 들으면 생각나

어른생활을 모방한 그때놀이

가상의 인생살이라 재미있어

이제는 자식도 각자 가정꾸려

마음의 무게 내려놓을 때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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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 할게. 너는 아빠 하고, 넌 아들 해라.”

초등학교 시절 소꿉장난하던 추억이 문득 떠올랐다. 필자가 현직 교수로 있을 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부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회장은 서석조 교수님(1921∼1999년)이었는데 그는 순천향대학교와 대학병원을 설립하신 분이다. 그는 특별한 취미가 있었다. 매월 개최하는 학회 임원회의가 끝나고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반주 삼아 술을 드시고 불콰해질 때쯤 꼭 노래 한곡조를 뽑으셨다. 교수님이 부르시던 가수 이선희의 ‘제이(J)에게’라는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지금도 라디오나 TV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한 여자아이가 연상된다. 어릴 적 소꿉놀이할 때 엄마 역할을 하던 친구다. 그의 성 이니셜이 제이였다.

한번은 손자·손녀를 불러다 놓고 ‘할아버지의 소꿉놀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들의 반응을 크게 두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첫째, 요즘 누가 그런 소꿉놀이를 하느냐는 거다. 어린 친구들도 실제 이성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심지어는 미래를 약속하기도 한단다. 세월이 이렇게 변했나. 이 말을 듣고 보니 유치원생처럼 유치하게 소꿉놀이를 한 게 창피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둘째, 소꿉놀이할 때 엄마 역할을 하던 친구가 할아버지의 첫사랑일 것이라는 유추. 그런데 동감하긴 어렵다.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한번도 만나본 적 없고, 상사병에 걸린 일도 없는데 어찌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나.

이 녀석들과 자주 대화 나누는 주제가 또 있다. 필자가 의사가 되기로 한 계기다. 어머니는 중학교 입학 선물로 책 한권을 선물하셨다. 책 속 주인공이 모든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고 의사가 된 내용이다. 그 서적은 필자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가 병약하신 점도 한몫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반드시 의사가 되어 허약하신 어머니를 나 스스로 돌보겠노라 다짐했다.

의사가 되겠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진 사건이 있다. 한번은 어머니의 병이 워낙 위중해 한밤중에 동네 의사에게 왕진을 청하러 갔는데 거절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어른이 되면 꼭 의사가 될 거야. 그래서 몸이 아프신 어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드려야지!’

정신분석학이나 정신 치료에서 기본으로 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동기 때 감정 양식이다. 인간이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핵심 요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거나, 발달이 좌절됐을 때 이것이 정서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다.

다시 필자 유년 시절의 소꿉장난 추억으로 화제를 돌려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손자·손녀의 분석처럼 소꿉놀이 때 엄마 역할을 한 그녀와의 정서적 교감이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곳저곳 수소문해서 그녀를 찾아보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인연이 닿질 않아 만나보지 못했다.

어릴 적 소꿉놀이는 어른이 하는 살림살이와 많이 닮았다. 부모와 자녀의 역할이 명확하고, 언행도 어른의 것을 모방한다. 하지만 소꿉놀이는 몇시간 지나면 끝나기 마련이나 실제 살림살이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실제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고 하루하루 삶을 영위하려고 밖에서 부지런히 일하며 돈을 번다. 연습이 아니라 실전이다.

가상의 역할을 경험해보고, 싫증 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소꿉놀이는 늘 재미있었다. 날이 바뀔 때마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아버지·남편·자식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감 탓에 실제 인생은 소꿉놀이처럼 늘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제 자녀는 장성해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거느리며 나름대로 살림살이해오고 있다.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

이근후 (이화여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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