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산’ 쌀 쌓아둘곳도 팔곳도 못 찾아…‘헐값 밀어내기’ 우려

입력 : 2022-06-22 00:00 수정 : 2022-06-22 05:49

햅쌀 수확 두달 앞으로...벼랑끝 쌀산업 ① 산지 곳곳 나락산성

RPC·DSC마다 볏가마 ‘빼곡’ 다른 농산물 수매에도 악영향

남부지역보다 쌀 생산량 적은 경기·강원까지 적체파장 확산

당진 등 극조생 재배 많은 지역 올해산 매입 차질 불가피 상황

대량 매입 내세워 ‘염가’ 요구 거래파기 사례도…산지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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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역 한 농협 벼 건조저장시설(DSC)에 창고 천장까지 벼가 가득 쌓여 있다. 농협은 DSC 창고 밖에도 벼 톤백을 쌓고 비닐로 덮어 야적까지 하고 있으나 물량 적체 문제는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국 쌀 산지가 극한의 혼돈에 휩싸여 있다. 올해 햅쌀 수확기가 두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미곡종합처리장(RPC)과 건조저장시설(DSC)마다 볏가마가 빼곡히 쌓여 ‘나락산성’을 이루고 있다. 심지어 지난가을 매입 후 쌀 한톨 팔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그사이 산지 쌀값은 속절없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산지는 매입 여력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로 쌀 수확기를 맞게 돼 매입 대란이 불가피하다는 호소가 빗발치고 있다. 최악으로 치닫는 쌀 재고 실태와 파장을 3회에 걸쳐 집중 조명해본다.



◆산지마다 쌀 적체 ‘비명’=산지 쌀 물량 적체 문제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햅쌀 수확기가 두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RPC와 DSC에 쌓여 있는 산더미 쌀 재고는 꿈쩍도 않고, 산지 쌀 유통환경은 갈수록 악화돼 올가을 매입대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경북 예천군농협쌀조공법인은 6월 중순 기준으로 벼 재고물량이 1만1000t에 달한다. 지난해에 견줘 6000t 많고, 평년보다 4000t 많은 물량이다. 지난해 쌀 생산 증가로 매입량이 늘어난 상태에서 쌀 시장격리가 지체되며 값 하락과 소비부진이 겹쳐 빚어진 문제다. 지금도 문제지만 전망은 더 암울하다. 조현웅 예천쌀조공법인 장장은 “8월 하순부터 햅쌀이 나올 텐데 지금 재고 수준이면 매입은 어렵다”며 “억지로 야적한다면 받을 수야 있겠지만 예년처럼 대량 매입은 힘들다”고 말했다.

더욱이 창고마다 꽉 들어찬 쌀을 두고 보리·밀 등 다른 농산물을 수매해야 하는 지역은 진퇴양난이다.

김철규 전남 해남 문내농협 조합장은 “벼 12만포대(조곡 40㎏들이)가 창고며 사일로에 가득 차 있어 최근 수매한 보리는 넣을 곳이 없어 야적해뒀다가 남의 창고에 빈자리가 생기면 옮겨놓고 다시 매입하는 실정”이라며 “지금 이 정도라면 올가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할 따름”이라고 토로했다.

양용호 광주·전남농협 RPC 운영협의회장(담양 금성농협 조합장)은 “양파와 보리 수매로 당장 창고가 필요한데 냉동창고까지 빈자리란 빈자리는 모조리 다 벼를 보관하고 있어서 지금 농협들은 속수무책”이라며 “벼 재고가 너무 많아서 창고가 부족해져 다른 농산물 수매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마트 물류창고까지 적재=전북 동김제농협 DSC의 벼 재고량은 8200t에 달한다. 지난해 매입량 중 1월 168t을 판매한 게 전부다. DSC 사일로와 양곡창고를 꽉 채우고도 남아 쌀을 더이상 쌓아둘 곳이 없어 야적해뒀던 500t은 지난 3월 인근 로컬푸드직매장의 물류센터로 옮겨 일반 상품을 밀어내고 보관 중이지만 언제 쌀이 비워질지는 알 수 없다.

전북 김제 금만농협 RPC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최승운 금만농협 조합장은 “예년 이맘때면 창고 한곳만 남기고 다 판매됐을 시기인데 모든 창고가 꽉 차 더 들어갈 곳이 없다”며 “RPC가 생긴 이래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쌀 물량 적체 문제는 그 어느 곳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쌀 재고 적체 파장은 남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쌀 생산량이 적은 경기·강원 지역까지 확산돼 RPC마다 큰 혼란에 휩싸여 있다. 석재현 경기 이천남부농협쌀조공법인 대표는 “지난해 이맘때는 재고가 거의 없어 10㎏들이 포장 대신 4㎏으로 만들어 물량을 조절했는데 올해는 쌀 재고가 6200t이나 남아 있다”며 “당장 8월말부터 매입해야 하는데 공간이 없어 올해 매입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사실 지난해 10월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예견됐다”며 “정부가 발 빠르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손을 놓고 있다보니 산지가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고 지적했다.

강원지역 역시 쌀 물량 적체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강원도 최대 쌀 산지인 철원지역의 경우 6월 중순 현재 재고량이 1만8000t으로 전년 동기(9600t) 대비 무려 8400t이나 많다. 진용화 철원 동송농협 조합장은 “햅쌀이 나오는 8월말 전에 창고물량을 어느 정도 소진해야 새로 벼를 매입할 텐데 지금 상황에선 쉽지 않다”고 말했다.

더욱이 극조생 벼 재배가 많은 지역은 한층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충남 당진지역의 경우 극조생종 벼 <빠르미>가 100㏊가량 재배되고 있는데, 수확시기가 7월말로 매우 빠르기 때문에 조속한 시일 내에 물량 적체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매입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박승석 충남 당진해나루쌀조공법인 대표는 “100㏊면 벼 800∼900t을 생산할 수 있는데 올해처럼 벼 재고가 많은 상황에서는 결코 적지 않은 물량으로 시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곡물가격 급등 속 ‘쌀 할인판매’=쌀 물량 적체 문제가 좀체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대다수 RPC와 DSC는 고육지책으로 할인판매에 나서고 있다.

충북 진천증평농협쌀조공법인은 최근 진천군의 지원을 받아 라이브 커머스(실시간 상거래)로 쌀 할인판매 행사를 진행했다. 9월까지도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쌀 재고 500t을 소진하기 위해 시중가보다 27.5%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에 나선 것이다. 여기서도 판매가 안되면 지역 식품업체에 가공용으로 매입가보다 낮은 가격에 넘겨 처분할 계획이다. 이준희 진천 이월농협 조합장은 “식품업체에 팔수록 손해가 커지기 때문에 일단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일반 소비자 대상 판매를 최대한 확대해 손실을 줄이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이처럼 RPC와 DSC가 물량 적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으나 쌀 유통업체와 도매상들은 산지의 절박한 사정을 악용, 값 하락을 부채질하면서 산지 유통체계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RPC에 쌀 대량 매입을 내세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덤핑 거래를 요구하는가 하면, RPC간 가격 경쟁을 부추겨 쌀을 저가로 납품받아 미끼상품으로 내건 유통업체 사례까지 나와 산지에 혼란을 더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전남 장흥에 문을 연 한 식자재마트는 쌀 20㎏들이 한포대를 3만9990원에 판매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김용경 장흥 정남진농협쌀조공법인 대표는 “정상가가 5만9000원인 쌀을 저가로 구매해 미끼상품으로 삼아 3만9990원에 판 것”이라며 “이런 사례가 확산되면 당장 재고를 줄이는 게 시급한 RPC들의 불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고 시장은 더 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라고 말했다.

산지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자 거래가 취소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경북 신포항농협 DSC는 민간업체와 계약한 쌀 5300t 판매건이 파기돼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다. 당초 조곡 40㎏당 6만2600원에 계약했으나 2차 시장격리 가격이 5만원대로 주저앉으며 가격차가 1만원가량 벌어지자 민간업체가 계약금 5%를 포기하고 거래를 취소해버렸다. 편해원 신포항농협 조합장은 “늦어도 7월 안에는 재고를 해결해야 하는데 DSC에 쌓인 산더미 물량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다”고 토로했다.

최덕병 농협RPC전국협의회 부회장(경북 경주 안강농협 조합장)은 “창고를 안 비우면 올가을 매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지금 농촌에 있는 농협들은 말 그대로 쌀 문제로 죽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전국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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