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08) 그저 그러려니

입력 : 2022-06-17 00:00

노름·오입질 서방에 질린 아내들

할매주막에 모여 일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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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사람들이 관아가 자리 잡은 대처로 나가려면 노루고개를 넘어야 한다. 사람들은 노루고개를 눈물고개라 부른다. 누나를 시집 보내며 고갯마루까지 따라온 어린 동생이 누나가 탄 가마가 가물가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소나무를 붙잡고 서럽게 우는 고개요, 석녀가 아이 못 낳는다고 쫓겨나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쏟는 고개라. 장에서 소를 팔아 기생집에 들렀다가 홀랑 털리고 터덜터덜 산마루에 앉아 가슴속 눈물을 쏟으며 한숨을 토하는 고개다. 노루고개 마루에 떨어진 눈물의 사연 보따리를 모두 매달려면 수많은 소나무가지 전부를 써도 모자란다.

고갯길을 오르는 산자락에는 주막이 있다. 주모가 초로의 할매라 주막이름도 ‘할매주막’이다. 눈물고개로 올라가는 한 많은 여자들은 모두 이 할매주막에서 막걸리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고 올라간다.

“오 진사의 처 최실이 아이가. 니는 뭣 때문시로 이 고개를 넘을라카노?”

할매의 물음에 최실이 고개를 오르기도 전에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집안의 지체로 보면 할매가 깍듯하게 ‘마님’이라 불러야 하지만 주모할매는 모두에게 하대한다. 보따리 하나 머리에 이고 주막 쪽마루에 앉아 막걸리 한사발을 마신 최실이는 마신 것을 모두 눈으로 쏟아내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시집온 지 이태도 안돼 새신랑이란 게 노름에 빠져 문전옥답 모두 날리고 그것도 모자라 새신부 금비녀랑 패물까지 노름판에 처박아 넣었다.

“남정네는 원래 허황한 꿈에 취해 사는 짐승이다. 일확천금을 노름으로 잡아보려고 그 짓을 하는 법이여.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아라.”

할매가 말을 건네며 보따리를 빼앗아 다락에 넣어버리고 뒷방에 잠자리를 마련해주자 최실이는 주막이 한창 바쁜 시간에는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에 들어가 술상도 차리고 설거지도 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하루는 저녁나절 이 초시의 처 청산댁이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주막에 들러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님들 저녁상이 왔다 갔다 하자 청산댁은 뒤꼍으로 가 쪽마루에 쪼그리고 앉았다. 부산하게 저녁상을 치우고 나자 한숨을 돌린 주모할매가 다가왔다.

“지금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겠지. 이럴 땐 이게 최고여.”

청산댁이 생전 처음 막걸리 한잔을 단숨에 비우고 기둥을 잡고 또 눈물을 흥건히 쏟았다. 주모할매가 청산댁 등을 쓰다듬으며 할매도 막걸리 한잔을 들이마셨다.

청산댁이 하소연하는 걸 할매와 최실이 들었다. 이 초시는 천하의 오입쟁이였다. 어린 기생 머리를 얹어주지 않나, 뒷집 과부를 탐하지 않나, 외장꾼 마누라를 건드렸다가 들통이 나 초주검이 되도록 두드려 맞기도 했다. 청산댁이 참다 참다 첩집 살림을 부수러 갔다가 오히려 옷이 찢기는 수모를 당하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남자들이란 치마만 둘렀다 하면 그걸 벗기려는 짐승들이여. 그러려니 하고 살아.”

할매는 지난번과 비슷하게 위로를 했다. 그 후 최실이와 청산댁은 서로 동네가 달라 모르는 사이지만 한방을 쓰며 동병상련 친구가 됐다. 가출한 두 양반 처가 소곤대더니 이튿날부터 손님들 술상에 앉아 술을 따랐다.

소문이 퍼지자 먼저 달려온 사람은 오입쟁이 이 초시였다. 청산댁이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자 이 초시는 문밖 쪽마루에 앉아 싹싹 빌었다.

“오늘 낮에 불여우 같은 첩년을 쫓아냈소. 제발 집으로 갑시다, 여보.”

얼마나 지났나, 안방에서 최실이와 자던 주모할매가 살며시 일어나 뒤꼍으로 가자 ‘철퍼덕’ 황소가 뻘밭을 지나갔고 이내 “나 죽어” 하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그날 밤으로 청산댁은 이 초시 손을 잡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잠이 달아난 주모할매가 개다리소반에 술상을 차려와 혼자 술을 마시더니 울기 시작했다. 놀란 최실이 일어나 술상에 마주 앉았다. 할매의 독백이 이어졌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네. 그렇게 노름에 오입질을 하던 신랑과 세살짜리 딸을 두고 집을 나온 게 영원히 생이별이 될 줄이야!”

할매가 긴 한숨을 토하더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걸. 내가 미쳤지. 명절 때 주막 문을 닫고 혼자 있으면 딸 생각이 나서 미칠 지경이네” 했다. 이튿날 세살짜리 딸을 업고 오 진사가 찾아왔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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