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호의 골목길] 서울 서촌 조선중화길, 걸음마다 ‘으뜸 문명국 조선’의 숨결 살아나…

입력 : 2022-04-18 00:00

이번 호부터 우리 골목길 인문역사기행에 나선다. 사람과 터,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전국 골골샅샅 골목길을 <골목길 역사산책> 저자인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이 맛깔 나는 이야기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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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건축된 체부동성결교회는 서울 서촌 조선중화길의 랜드마크이자 지금은 ‘서울시 우수 건축자산’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곳이다. 서울시는 민족유산 보존을 위해 지난해 매입, 생활문화지원센터와 북카페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진 기자

[최석호의 골목길] ① 서울 서촌 조선중화길

영조 잠저 터였던 ‘통의동 흰 소나무 집’ 조선 실학자 추사 김정희 어릴적 머물러

‘라갤러리’서 박노해 시인 사진전 볼거리

영의정 문곡 김수항이 자리잡은 ‘송석원’ 남정 박노수 화백 사후 미술관으로 변신

한옥 품은 서양식 예배당 ‘체부동교회’

 

1592년부터 왜 오랑캐가 쳐들어온다. 7년전쟁 임진왜란이다. 1636년 겨울 청나라가 쳐들어오니 병자호란이다. 사대부와 백성은 뿔뿔이 흩어진다. 이때 조선중화를 외쳐 부른 선비가 있다. 삼연 김창흡이다. 대중화(大中華) 명이 망했으니 이제 세상에 남은 문명국가는 조선밖에 없다. 그러니 소중화(小中華)가 아니라 조선중화(朝鮮中華)다. 서촌에 이웃해서 살고 있는 양반과 중인을 제자로 길렀다. 조선 곳곳을 걸었다. 국토를 재발견하고 진경시대(眞景時代)를 연다. 기이하고 고아한 조선 풍속을 시로 읊었다. 진경시(眞景詩)다. 아름다운 조선을 그렸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다. 영조와 정조는 태평성대를 누린다. 이 모든 것은 나라 곳곳을 두 발로 걷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온 세상 으뜸 문명국가 조선의 후예다. 서촌을 걷는다. 조선중화를 걷는다.
 

배우기를 부끄러워 말라, 통의동 백송

서울 종로구 통의동 백송은 줄기가 흰 중국산 소나무다. 영조 잠저(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 터다. 딸 화순옹주를 월성위 김한신에게 시집보내면서 같이 살 집을 지어준다. 그 집이 바로 통의동 백송 자리다.

통의동 백송집 대문에 붙여놓은 ‘입춘대길(立春大吉)’ 글자를 보고 한 선비가 문을 두드렸다. 분명히 연소한 청년의 글씨지만 서체가 좋았다. 만나보니 추사 김정희였다. 그런데 어린아이다. 초정 박제가가 주저하지 않고 자청하여 스승이 됐다. 추사는 초정에게 북학을 배운다. 25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스승이 가르쳐준 대로 북경에 가서 담계 옹방강을 만난다.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앞선 문명을 이뤘다면 배우기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불치하문·不恥下問)는 스승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는다, 라갤러리

라갤러리는 박노해 사진전을 열고 있는 카페다. 박노해는 1980년대 독자에게 사랑받은 <노동의 새벽>을 출간한 시인이다. 라갤러리는 시인이 만든 비영리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에서 운영하고 있는 갤러리카페다. 나눔문화는 정부지원과 재벌후원을 받지 않는다. 언론에 홍보하지도 않는다. 잘할 수 있는 일보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박노해는 27세 되던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군부독재정권은 금서 조치를 내렸다. 시집은 날개를 단 듯 100만부 넘게 팔렸다. 박노해는 감시를 피해 사용한 필명이다.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뜻이다. 1989년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천명하고 ‘사노맹(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을 결성했다. 1991년 체포돼 참혹한 고문을 당한다.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 1998년 마침내 석방된다.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된다. 그는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다. 시인은 전쟁터로 달려간다. 처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2010년 첫번째 사진전 ‘라 광야’전을 연다. 2022년 현재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20번째 전시 ‘내 작은방’전을 열고 있다.
 

청자기와집? 청와대

삼봉 정도전과 태조 이성계는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을 설계한다. 조선 태조 4년 1395년 왕경 한양에 경복궁을 완공한다. 세종 8년 1426년 경복궁 후원(後苑)을 조성한다. 지금 청와대가 있는 곳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총독관저를 경무대(景武臺)라 고쳐 부르고 대통령 집무실로 쓴다. 일제를 계승하는 꼴이 됐다. 1960년 4·19혁명 뒤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이 처음으로 청와대(靑瓦臺)라 불렀다. 청자기와로 이은 집이라는 뜻이다. 청자기와로 고려 황궁 양이정 지붕을 이었던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실제로 청와대를 지은 분은 노태우 대통령이다. 1991년 9월 2층 본관과 단층 별채 2개동을 배치하고 청와로 잇는다. 이게 웬일인가? 청자기와가 아니라 그냥 청색 기와다.


맑은 바람 불어오니, 청음 김상헌 집터 무궁화동산

청음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호종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척화대신이다. 인조가 잠실벌에서 항복례를 치르기로 하자 낙향한다. 전쟁의 책임을 지라는 청의 요구에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청음이 지은 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산천을 등지고자 하랴마는 / 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그의 집터가 있는 동네는 궁정동이다. 왕후가 되지 못한 일곱 분의 위패를 모셨다고 하여 칠궁이라 불렀던 곳인데, 경복궁 북서쪽 궁장 옆에 연이었다. 칠궁 옆에 우물이 있었기에 궁정동이라 불렀다. 칠궁 서쪽 청음의 집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안가가 있던 자리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쏜 역사의 현장이다.


나라를 빼앗기니…송석원 박노수미술관

송석원에 제일 먼저 자리를 잡았던 분은 삼연 김창흡의 부친 문곡(文谷) 김수항이다. 영의정을 지낸 문곡 김수항이 1686년 청휘각(晴暉閣)을 지었다. 송석원 터인 옥류동에 지은 별서다. 서촌에는 옥류동 송석원 입구 다리 난간, 대문 기둥, 계단, 한옥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곳곳에 남아 있는 송석원의 흔적은 서인의 자취는 아니다. 황후의 후광을 등에 업은 민규호에게 빼앗긴다. 1910년 나라를 판 대가로 일왕에게 은사금을 받은 윤덕영이 사들여서 고쳐 짓는다. 송석원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은 박노수미술관이다. 한국화가 남정(藍丁) 박노수 화백께서 1973년부터 2011년까지 사시던 집이다.


금오재가 있는 체부동성결교회

체부동생활문화지원센터는 체부동성결교회 예배당과 사택 금오재(金五齋)로 이뤄져 있다. 매주 금요일 아이 다섯명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하여 금오재다. 금오재는 조선집이다. 서울시에서 인수해 복원·수리하는 과정에서 금오재 마당 벽채에 가려진 꽃담을 발견하고 복원했다. 빨간 벽돌로 지은 서양식 예배당과 조선집 금오재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예배당을 처음 건축한 것은 1931년이다. 신축 당시에는 프랑스식으로 벽돌을 쌓았다. 벽돌의 긴 단면과 짧은 단면을 번갈아가면서 쌓는 방식이다. 정면에 같은 모양 같은 크기 출입문 두개를 두었다. 출입문 두개로 남녀를 구별함으로써 전통 유교 윤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만듦으로써 남녀가 평등하다는 근대사상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원래 십자가 모양이었던 예배당을 늘려서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넓힌다. 이때 넓힌 부분은 영국식으로 쌓았다. 한단을 쌓을 때는 벽돌의 긴 단면만 드러나게 쌓고, 그 위에 다음 단을 쌓을 때는 짧은 단면만 드러나게 쌓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종탑을 쌓으면서 출입문을 막았다. 출입문 두개를 막을 때는 한국식으로 쌓았다. 이번 주말에는 서촌으로 가서 한 건물 세 나라 벽돌 쌓기 방식을 눈으로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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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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