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79) 안개 속으로 사라지다

입력 : 2021-09-17 00:00 수정 : 2021-10-05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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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 세 손가락 없는 개평꾼 노 서방

묵집 과부가 준 전대 들고 노름판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합강나루 주막에 어둠살이 내리면 저녁상을 물린 장돌뱅이들은 곰방대를 두드리고 연신 들창을 열어보며 심란해진다. 빗줄기로 봐선 밤새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내일이 장날인데.

이경이 되자 여기저기 어울렸던 술판도 시들해지고 뒤꼍 구석에 처박힌 객방이 아연 반짝이는 눈빛들로 술렁거린다. “자∼ 내일 장은 종쳤고 운발이나 대 보자구.” 항상 시동을 거는 건 소장수 곽대룡이다. 벽을 등지고 쪼그려 앉은 개평꾼 노 서방이 슬며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더니 도롱이를 쓰고 주막 삽짝을 나서 빗속을 걸어가 막 문을 닫으려는 장터가의 묵집으로 들어갔다.

묵집 과부와 개평꾼은 초면이 아니다. 노름판이 무르익어 삼경이 되면 노름꾼들은 밤참으로 묵을 시킨다. 묵집에 심부름을 가는 사람은 이 개평꾼이요, 물주에게 돈을 받아 계산해주는 사람도 이 개평꾼 노 서방이다. 묵집 과부가 눈을 크게 뜨고 “오늘은 워찌 이리 일찍 오는 거요?” 하고 묻자 고개를 푹 숙인 노 서방은 “이모, 부탁 하나 합시다. 간단하게 제사상 하나 차려주시오” 하고 뜬금없이 말했다.

“무슨 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여?” 묵집 과부가 어안이 벙벙해져 입만 벌리고 있자 노 서방은 어미에게 조르는 아이처럼 쪼그려 앉아 얼굴을 무릎 사이에 박고 울기 시작했다. “오늘이 불쌍한 마누라 제삿날이요. 으흐흐흑.” 묵집 과부가 안주를 만들려던 북어를 꺼내고 이 반찬 저 반찬에 뒷마당에서 홍시를 따와 제사상을 차렸다.

노 서방은 품속에서 빨간 주머니 하나를 꺼내 상 위에 놓고 술 한잔 따른 후 절하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일어설 줄 몰랐다. 묵집 과부가 뒷전에 앉아 가만히 보니 궁금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제사가 끝나자 노 서방은 음복주를 마시고 눈물을 닦으며 우물로 가 세수를 했다. 묵집 과부는 하도 궁금해 제사상 가운데 놓였던 빨간 주머니를 풀어보다가 “엄마야∼!” 하며 뒤로 발라당 넘어져 기절했다. 빨간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세개가 나온 것이다. 소금에 절여져 조금 쪼글쪼글했지만 손톱까지 그대로 붙어 있는 틀림없는 손가락이었다. 노 서방은 묵집 과부와 탁배기잔을 부딪히며 서로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보아하니 노 서방의 오른손 손가락 세개가 잘려나가고 없었다.

노 서방이 노름판을 쫓아다니다 논밭 다 날리고 마침내 친정아버지가 마련해준 집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자 마누라가 방앗간에 목을 매 이승을 하직했다. 노름판에서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낫으로 새끼줄을 끊고 마누라를 부둥켜안은 채 그 낫으로 손가락 세개를 잘라냈던 것이다. 두번 다시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염장해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녔지만 오갈 데가 없어 다시 노름판을 기웃기웃하며 개평이나 뜯어 목숨을 이어가는 중이다.

묵집 과부의 사연도 기가 막혔다. 신랑이란 게 천하의 오입쟁이였다. 치마만 둘렀다 하면 노소귀천 불문하고 쓰러뜨려 세번째 첩살림을 차리자 집을 나와버렸다. 묵집 과부가 갑자기 ‘후∼’ 호롱불을 꺼버렸다. 부시럭부시럭 옷 벗는 소리가 나더니 헉헉 철퍼덕 황소가 뻘밭을 걷다가 긴 숨을 토하고 불을 켰다. 과부가 농을 열고 전대를 꺼내 노 서방에게 건넸다. 노 서방은 똑바로 주막으로 가 노름방으로 들어갔다. 노 서방이 투전판에 끼어들자 노름꾼들은 모두가 노 서방의 주머니 사정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패가 서너번 돌아가자 안심했다. 판이 점점 커졌다.

이튿날도 비가 왔다. 장은 파장되고 노름판은 열기를 더했다. 장돌뱅이들의 투전놀이가 골패로 바뀌면서 노름판이 부쩍 커져 약재상·금은방·천석꾼 부자 황 참봉과 유기점 오 대인 등 토호들이 돈 보따리를 싸들고 모여들었다. 소장수·새우젓장수·방물장수 등 조무래기 장돌뱅이들은 진즉에 나가떨어지고 전대가 두둑한 이 고을 부자들이 거세게 어울렸다.

기존 노름꾼들이 모두 두손을 털었지만 노 서방은 판을 주도했다. 삼경이 되자 다른 개평꾼이 묵집에 다녀오고 뒤이어 과부가 묵판째 이고 와 묵을 채 썰어 한사발씩 돌렸다. 여느 때면 밤참 후 노름판은 아연 활기를 띠고 모두 골패 앞으로 바짝 다가앉아 두 눈에 광채를 뿜는데, 오늘은 모두가 병든 병아리 눈을 한 채 하품만 하며 어눌해져 헛손질만 일삼았다. 노 서방만이 팔팔하게 판돈을 키웠다. 새벽닭이 울 무렵엔 판돈이 몽땅 노 서방한테 모여들었다. 쥐 오줌, 고양이 간, 숙지황, 노린재, 놋젓가락나물 뿌리 등을 넣고 끓여 만든 묵을 먹고 노름꾼들은 비몽사몽 헤매다가 동녘이 밝을 때 다 털리고서야 깨어났다. 거금을 챙긴 노 서방은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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