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쉼이 필요한 당신에게, 헨델의 ‘라르고’

입력 : 2021-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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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하자마자 첫째 아이를 갖게 돼 경력이 단절된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후에 계획하지 않았던 둘째와 셋째가 연이어 생겼습니다. 그는 좁은 아파트에서 빠듯한 살림으로 세 아이를 키우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려니 친구 남편도 직업을 2∼3개 갖고 밤새 일했습니다. 친구는 입덧이 심해 임신 기간 먹지도 못하고 조산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힘겹게 출산을 했는데, 그래도 3남매가 참 효자·효녀입니다. 다둥이를 가진 덕분에 주택청약에 당첨돼 최근 큰 집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쁜 마음에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밀려 있던 이야기보따리를 정신없이 풀어놓다보니 시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친구가 학교에 간 아이들을 데리러 나간 후 혼자 앉아 집을 둘러보는데 짐이 쌓여 있는 주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몇번이나 전셋집을 옮겼던 친구는 사실 전에 살던 집에서도 이삿짐을 다 정리하지도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에겐 정리도 사치였을까요.

그에게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어 일단 모든 물건을 꺼내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버릴 것을 종류대로 분류했습니다. 쓸 만한 것만 남기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예쁜 찻잔은 자신을 찾아줄 부부의 여유 있는 시간을 기다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영양제가 그렇게 많은지…. 출산 후 몸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며 밤새워 아이를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못했을 친구.

그가 걸어온 고난의 길을 떠올려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아이 셋을 끼고 잠도 편안히 잘 수 없었던 친구는 무슨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을까요. 시집보낸 딸을 걱정하는 친정엄마처럼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말로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하루만 먹고 자고 쉬고 싶다고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싶어 훌쩍 떠나지도 못하는 것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일 테지요.

쉼이 필요한 친구와 당신에게 이 곡을 추천합니다.

“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편안한 쉼을 주는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그늘이여….”

바로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 세르세의 아리아 ‘옴브라 마이 푸(ombra mai fu)’입니다. 우리말로 ‘사랑스러운 나무 그늘이여’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지금까지 이런 나무 그늘은 없었다’ 정도로 풀이하는 것이 더 맞는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순하지만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심오한 삶의 깊이와 넓이 때문일까요? 기악으로 편곡된 이 노래는 ‘느리게, 폭넓고 풍부하게’란 뜻을 지닌 ‘라르고(largo)’라고도 불립니다. 헨델 시대에는 성인이 된 후에도 여성의 음역을 내는 거세한 남자 가수 카스트라토가 불렀지만, 현대에는 훈련된 카운터테너가 부르는 매력적인 곡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나무 그늘은 없었네, 더욱 사랑스럽고 달콤한 그늘이여.”

푸르디푸른 플라타너스 그늘 밑에서 잠시 피곤한 눈을 감아봅시다. 헨델의 선율을 타고 온 달콤한 노랫소리가 힘들고 지친 당신의 마음을 위로해줄 것입니다.

이기연 (이기연오페라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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