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김중업의 독자적인 건축세계

입력 : 2021-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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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프랑스대사관 옛 모습. 그동안 여러번 증개축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사진제공=안양시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유네스코는 한국 정부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릴 ‘제1회 국제예술가대회’에 대표 예술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 곳간이 텅 비었으니 지원금 없이 사비로 갈 예술가를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5명이 뽑혔는데 이 가운데 서른살의 김중업이 있었다. 당시 김중업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였지만, 피난처 부산에서 대가족을 부양하느라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강의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왕복 여비는 주변 사람들에게 얻고 직항 비행기가 없는 터라 8개국을 거쳐 나흘 만에 겨우 베네치아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김중업은 운명처럼 ‘르코르뷔지에(1887∼1965년)’를 만났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였고, 김중업은 건축과 학생 시절부터 그를 동경해온 터였다.

결국 김중업은 행사가 끝난 후 귀국하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사무소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그의 제자가 됐다. 1956년 귀국했을 때, ‘르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라는 이력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순식간에 유명 건축가가 된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르코르뷔지에 벗어나기’에 매진했는데, 첫 결실이 된 작품이 바로 주한프랑스대사관(1962년)이었다. 서양 건축을 따라 하기에 바빴던 당시 국내 건축계 상황을 고려하면 주한프랑스대사관 건립은 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한국 건축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그 후 김중업은 서산부인과(1967년), 유엔기념공원 정문(1966년), 제주대학교 본관(1969년) 등 또 다른 걸작들을 연이어 내놨다.

김중업이 독자적인 건축세계를 걸으며 선택한 것은 ‘한국이라는 지역성’이었다. 서양 건축가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경쟁력’을 찾고자 한 그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대체 불가능한 경쟁력을 농촌과 연결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1992년이었던가. 필자가 가입한 동아리에서 한 농촌마을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는데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30∼40대 젊은 농민들이 많았는데, 단합도 잘 이뤄졌고 만날 때마다 토론의 장이 열렸다. 무엇보다 자신이 재배하는 작물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 지역 지형과 기후에 맞는 특산물이라 백화점에서 비싸게 팔린다고 자랑했다.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춘 농민들이 자신감에 넘쳐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전까지 팍팍한 봉사활동을 자주 경험했던 터라 이런 농촌도 다 있구나 싶었다.

그때 봉사단원이 대롱대롱 매달린 열매에 일일이 흰 봉지를 씌웠던 그 특산물은 바로 경북 상주시 모동면의 포도였다. 계절의 경계를 넘어 대형마트에 나오는 외국산 포도를 생각하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그 마을 농민들은 안녕하신지, 그분들의 자부심이었던 포도농사는 여전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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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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