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65) 공즉시색

입력 : 2021-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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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지만 성질 급한 유세돌

부친 가르침대로 불경을 외우고

 

유 진사의 독자, 유세돌은 재기가 넘친다. 톡 튀어나온 이마, 반짝이는 눈동자, 꼭 다문 입, 훤칠한 키, 떡 벌어진 어깨. 수려한 외모가 벌써 보통 아이들하고는 남달랐다. 또래들이 아직도 책 <동몽선습>이나 <사자소학>에 얽매여 있는데 세돌은 벌써 사서를 떼고 <주역>에 빠져 있었다. 훈장님은 세돌이 질문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답변할 수 없어 쩔쩔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훈장님이 잔칫집에 가거나 상가에 문상을 갈 때면 세돌이 회초리를 든다. 학동들은 세돌을 훈장님보다 더 무서워했다. 유 진사는 장에 갈 때나 마실 갈 때면 서당에 들러 외동아들 세돌이 공부하는 걸 지켜보다가 훈장님 소매를 끌어 너비아니 집이나 주막으로 갔다.

“우리 세돌이 어떻습니까?” 유 진사의 물음에 “말도 마십시오, 소생이 배워야 해요”하며 훈장님이 손사래를 쳤다. “내년 봄에 소과에 응시하고 내후년에는 대과를 보도록 합시다.” 훈장님의 제안에 유 진사는 미소로 답했다. 훈장님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런 말씀 드려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훈장님이 말을 아껴 “세돌의 재주는 알성급제를 열번 하고도 남을 테지만 등용하고 나서는 인품이 출세의 척도가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물론이지요.” 유 진사의 미간이 접혔다. “성질이 급해요. 그러고 성격이 유하지 못해요.” 술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서당 학동들이 모두 세돌을 싫어합니다”라고 말을 마친 훈장님이 응어리가 풀린 듯 ‘후∼’ 한숨을 토했다. ‘나를 닮았구나.’ 유 진사도 한숨을 토했다. 그날 밤 세돌은 유 진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의 글공부는 견줄 사람이 없어 이 애비는 항상 흐뭇하다. 그런데 너는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 뽑을 수가 없단다.”

“아버님 말씀을 유념하여 경박한 언행을 하지 않겠습니다.” “화날 때는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반야심경> 한구절만 외우고 화내도 늦지 않다.” “명심하겠습니다.”

며칠 후 세돌이 저잣거리에서 붓과 먹을 사가지고 집으로 오는데 하인의 아들 녀석이 ‘잘슴잘슴’ 걸어가고 있었다. 소아마비를 앓아 왼다리를 절었다. “잘슴아, 너 어디 갔다 오냐?” 잘슴이 생글생글 웃으며 “삼촌 원두막에 다녀오는 길이야. 형아는 어디 갔다 와?” 묻자 세돌이 “문필방에” 하고 답했다. 둘이서 재잘거리며 땡볕 아래로 걷다가 “형아, 먼저 가. 나는 좀 쉬었다 갈게” 하며 잘슴이가 길가 바위에 앉았다.

“내 등에 업혀라.” 다섯살 잘슴이는 삐쩍 말라 별로 무겁지 않았지만 하지가 지난 날씨는 더웠다. “아작아작” 세돌의 등에 업힌 잘슴이가 주머니에서 꺼낸 참외를 먹었다. 업기 전에 세돌은 봐서 알았다. 잘슴이가 원두막에서 참외 두개를 얻어 양쪽 조끼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있었다는 걸. 당연히 하나는 이 더운 날 업어주는 형한테 줘야지! 개울 건널 때 이 자식을 등에서 떨어뜨려 물에 처박아 넣어야지. 바로 그때 잘슴이가 말했다. “형아 이거 먹어. 이게 더 달다.” 아∼ 이럴 수가! 잘슴이는 한입씩 먹어보고 더 단 참외를 골라서 세돌에게 준 것이다. 등에 업힌 잘슴이를 개울에 처박기 전에 <반야심경> 한구절을 외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얼음처럼 찬 개울에 두발을 담그고 세돌과 잘슴이는 나란히 앉아 아작아작 참외를 먹었다. 잘슴이 아버지는 세돌네 집 머슴이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하는 찬모다.

한달쯤 지난 어느 날, 밤새 비가 오더니 동이 틀 때 그쳤다. 유 진사가 논물을 보러 가려고 머슴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마누라인 찬모도 안 와 안방마님이 아침상을 차렸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야 머슴과 찬모가 나타났다. 유 진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장 나가게! 둘 다. 저녁에 와서 새경 정리하고.” 머슴과 찬모 부부는 고개를 푹 떨군 채 대문 밖으로 나갔다. 유 진사는 아침부터 막걸리 한사발을 마셨다. 그때 행랑아범이 다가와 “나으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자 치밀어 오르던 화를 가라앉히느라 씩씩거리던 유 진사가 “뭔가?” 하고 물었다. “근래 머슴 오 서방이 툭하면 늦게 오고, 일하다 말고 집으로 가고 한 게 그의 아들 잘슴이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어젯밤에 죽었습니다요. 오늘 아침에 산에 묻고 오느라고….” “아∼ 이럴수가!” ‘쾅’ 하고 마루가 꺼질 듯이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유 진사는 벌떡 일어나 ‘쿠루루’ 대문 밖으로 나가 오 서방 집으로 갔다. 유 진사는 오 서방을 데리고 아직 삽짝도 열지 않은 주막으로 가 술을 퍼마셨다. 안방마님은 찬모를 데리고 절로 가 잘슴이 사십구제를 시작했다. 세돌은 열일곱에 대과에 급제해 스물셋에 암행어사를 하고 승지가 되어 국사에 몸을 바치며 주위 사람들과 한번도 틀어지는 일 없이 부드럽고 진중하게 처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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