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대대익선’ 단위조합 등장…‘농촌 변화 바람’ 새마을운동 주도

입력 : 2021-04-16 00:00

[농협중앙회·농민신문 공동기획] 농협 60년을 넘어 100년으로

[1부] 연대기로 읽는 60년 ② 1970년대 - 사업의 뿌리를 내리다


마을단위 ‘이동조합’ 통합 읍·면 중심 조합으로 재편

규모 확대…협동회 꾸려져 농협운동 확산 토대 역할

독농가연수원 개원 계기 새마을지도자 교육 맡아

농산물 유통에 본격 나서 농촌 저축 열풍 이끌기도

 

1972년 경기 안성 미양단위조합(현 미양농협)이 국내 최초로 24㎏들이 종이봉투에 담긴 쌀 ‘지대미’를 선보인다. 당시 쌀은 주로 80㎏들이 볏짚 가마니에 담겨 동네 쌀가게에서 소량씩 덜어 판매됐다. 이후 지대미가 인기를 끌며 1970년대말까지 전국 약 30개 단위조합이 지대미 생산에 돌입한다. 쌀 유통의 혁신으로 꼽히는 지대미 탄생은 당시 농협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농협이 만든 용어인 지대미가 국어사전에 올랐을 정도다. 농협은 1970년대 마을단위로 쪼개져 있던 이동(里洞)조합을 읍·면 중심의 ‘단위조합’으로 재편해 성장을 위한 기초체력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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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들어 당시 농협 시·군 조합이 담당하고 있던 비료·농약 공급 업무가 모두 지역의 단위조합으로 이관된다. 1970년대초 농협중앙회 충남도지회에서 ‘단위조합업무이관식 및 자립촉진대회’가 열리고 있다.

◆단위조합 탄생하다=‘대대익선(大大益善, 크면 클수록 좋다).’

농협중앙회는 1969년 이동조합의 역할과 기능을 한층 높이고자 읍ㆍ면 단위의 통합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조합ㆍ조합원의 적정 규모가 한창 논의됐는데, 이때 나온 결론이 ‘대대익선’이다. 조합이 커야 자금조달이 쉽고 적정 규모의 사업을 찾아 자립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후 ‘단위조합 자립 5개년 계획(1970∼1974년)’을 필두로 이동조합 통합이 속도를 낸다. 1968년말 1만6089개였던 이동조합은 1973년 1549개 단위조합으로 통합된다. 조합당 평균 조합원수도 130명대에서 1300명대로 늘어난다. 합병이 마무리 되어가던 1973년, 농협법 개정으로 단위조합이라는 용어가 공식 등장한다.

농협중앙회는 기초경영자립조합 육성계획(1973∼1977년), 성장자립조합 육성계획(1977∼1981년) 등을 연이어 펼쳐 단위조합의 체질 개선에 박차를 가한다.

조합 규모가 커지며 지역 곳곳에 ‘풀뿌리조직’이 육성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우선 단위조합별 마을단위에 협동회(1973년)가 꾸려진다. 협동회는 작목반·저축반·부녀회 등으로 세분화돼 농협운동 확산의 토대가 된다.


◆새마을운동 주도하다=1971년 전국 3만여곳의 농촌마을에 시멘트 300포대씩을 무상 지급하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한국 농촌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다. 이 새마을운동 배경에는 농협이 있었다. 당시 새마을운동의 구호는 ‘근면·자조·협동’이었다. 이보다 앞서 농협도 ‘자조·자립·협동’을 지도이념으로 삼는다. 새마을운동과 농협운동이 가리키는 큰 방향이 같았던 셈이다.

농협은 1972년 1월 경기 고양에 농협대학 부설로 독농가연수원을 연다. 전국 시·군에서 선발된 선진농민을 대상으로 영농기술교육과 이념교육을 펼치기 위해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독농가연수원의 개원과 운영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박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성공의 첫번째 조건으로 농민들의 자조 정신을 꼽았던 터였다. 이를 계기로 새마을운동 초기 지도자 교육을 농협이 맡는다.

독농가연수원은 1973년 경기 수원으로 터를 옮겨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현판을 바꿔 단다. 교육 과목은 영농지식·농협운동·새마을사업·교양·정신교육 등 5가지다. 1980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 독립법인으로 분리되기 전까지 농협중앙회가 운영하며 교육·예산 등을 주로 맡았다.

농협은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각종 사업도 활발히 펼친다. 특히 단위조합은 읍·면 단위로 ‘새마을 소득종합개발사업(1977년)’을 추진하며 지역농업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농업 생산기반 정비, 농업 기계화 등을 농협이 주도한 것이다.


◆농협사업 도약하다=농협은 1970년대초 정부의 곡가조절용 양곡을 시중에 공급하는 ‘양곡직매소’를 운영하며 양곡유통에 팔을 걷어붙인다. 양곡직매소는 1979년 농협지정양곡판매점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수도 2700여곳으로 확대, 양곡 부정유통과 폭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산지유통’을 포함한 농산물 유통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도 이때다. 1971년부터 단위조합이 시범작목반 등을 본격 육성한다. 이후 1976년부터 농협공판장이 법정도매시장과 같은 지위를 인정받아 농산물 도매 기능도 대폭 강화된다. 농협중앙회는 1976년 서울 마포구 신촌 일대에 첫 직영 슈퍼마켓을 열고 농산물 소매시장 개척에도 뛰어들었다.

영농자재 공급도 본궤도에 오른다. 특히 1976년부터 농협이 전국 비료를 전담 공급하며 ‘비료가격 표준화’라는 성과를 올린다. 당시 지역별 배송비 등을 이유로 비료 가격이 천차만별이었지만, 전국 1500여개 단위조합의 공급망과 인력을 활용해 가격 표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금융사업도 성장 가도를 달린다. 1969년 시작된 농협상호금융이 1974년 전국 단위조합의 99%까지 확대된다. 1972년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추진된 ‘농어촌 1조 저축운동’을 상호금융이 주도적으로 이끌며 성장의 발판을 다진다. 이 운동은 당시 농업부문 생산이 국민총생산(GNP)의 28%에 달하는 데 비해, 농어민저축은 전체의 7.5%에 불과한 상황을 호전시키고자 출범한다. 농협은 영농적금·농어가목돈마련저축 등을 개발하며 농어촌 저축 열풍을 주도한다. 상호금융 예수금은 1973년 277억원에서 1980년 8238억원으로 눈부시게 성장한다.

이밖에 자산이 부족한 농민에게 담보를 제공하는 농림수산보증제도(1972년)가 설치된다. 수출입 활성화에 따라 농협중앙회가 외환업무를 본격화하는 등 농협의 경제·신용 사업이 뿌리를 내린다.

김해대 기자 hdae@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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