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여행] 동강 바위절벽 틈새 도도히 맺힌 생명력, 꽃이 나를 부르네

입력 : 2021-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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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의 동강할미꽃. 동강할미꽃은 척박하고 높은 바위틈에서 자라나 역경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강인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김도웅 기자의 감성여행] ⑤ 강원 정선 동강할미꽃 자생지

허리 꼿꼿이 세운 채 꽃잎 여는 전세계 하나밖에 없는 할미꽃

석회암벽 틈에 서식하는 한국 특산...강원도 말로 바위절벽 ‘뼝대’서 자쪽

유명세 타면서 한때 위기 겪어...생존 필수 묵은 잎은 뜯어선 안돼

 

친애하는 J에게


고향이 어디라고 하셨던가요. 제 고향은 경남의 한 작은 도시입니다. 스무살까지 그곳에 살았어요. 그 후로는 대부분이 그렇듯 학교를 따라, 직장을 따라 여태껏 타향을 떠돌고 있습니다. 타향살이하는 이들에게 고향은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다녀가는 곳’이 돼버렸습니다. 어릴 적 추억이 선명한 곳, 고향은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다친 마음을 다독여줄 포근한 품이 아니던가요.

강원 정선에 동강할미꽃을 만나러 다녀왔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에는 여행(旅行)이 아니라 여정(旅程)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동강이 고향인 동강할미꽃. 구불구불 휘감아 도는 동강을 따라가는 길이 마치 처음 가보는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 처음 간 곳은 강원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잘못된 정보 탓에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귤암리로 갑니다. 정선 생태체험학습관 앞이지요. 강 쪽으로 나 있는 너럭바위로 내려가봅니다. 몇몇 군데 발 아래 바위틈에서 동강할미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할미꽃의 아름다움에 서너시간이 훌쩍 흘렀습니다. 연분홍색이나 붉은 자주색 혹은 청보라색을 띤 할미꽃. 하지만 개체수가 많지 않아 말 그대로 ‘숨은그림찾기’입니다. 누군가 올해는 개체수가 많이 줄었다고 하네요.

그다음은 인근 도로 옆 절벽입니다. 찬찬히 걸으면서 둘러보니 절벽 곳곳에 몇몇 동강할미꽃이 보입니다. 흙도 없는데 어찌 저리 높은 곳에 피었을까요. 바위틈에서 자라는 생명력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동강할미꽃은 전세계에서 영월과 정선 등 동강 유역의 산 바위틈에서만 자라는 유일한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동강할미꽃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꽃잎을 여는 전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할미꽃이에요. 마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다’는 듯 말이지요. 동강할미꽃은 강원도 말로 ‘바위 절벽’을 뜻하는 ‘뼝대’에서 자랍니다. 1997년 봄, 김정명이라는 사진가가 동강을 거슬러 생태사진을 찍던 중 우연히 귤암리 석회암 뼝대에서 할미꽃을 발견하곤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듬해 ‘한국의 야생화’라는 그의 꽃 달력에 사진을 실었고, 일반 할미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본 이영노 한국식물연구원 박사가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종자를 채취해 분석한 결과, 이 할미꽃이 동강 유역 석회암 암벽 틈에서만 자라는 한국 특산종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2000년에 동강할미꽃(Pulsatilla Tongkangensis Y.N.Lee & T.C.Lee)이라는 학명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야생화 동호인과 사진가들에게 알려지면서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예쁘게 찍기 위해 생존에 필수적인 묵은 잎을 뜯어내거나 캐 가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찍지 못하게 꽃을 꺾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올해 개체수가 줄어든 이유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2005년부터는 귤암리 마을주민들이 동강할미꽃보존회를 결성하고, 보존과 증식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고 합니다.

“2009년 국립수목원과 함께 귤암리 절벽 800m 구간의 개체수를 확인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850여개이던 개체수가 올해 3월에 확인해보니 대략 100여개밖에 안됐습니다. 8분의 1이 줄어든 셈입니다. 사람들이 몰래 캐가도 동강할미꽃의 생육을 이해하지 못하면 살리지 못합니다.” 동강할미꽃보존회를 만들고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는 서덕웅씨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무분별한 채취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에 동강할미꽃보존회는 아예 씨앗을 받아 3∼6년간 키운 모종을 판매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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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할미꽃의 묵은 잎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사진을 예쁘게 찍기 위해 뜯어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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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할미꽃은 첫해에는 꽃 한개, 다음해에는 두개, 해마다 꽃수를 늘려간다(왼쪽). 10송이가 넘는다는 것은 10년이 넘은 꽃이라는 뜻이다. 숙이고 있다가 만개하면 고개를 꼿꼿이 세운다(오른쪽).

이튿날, 몇송이밖에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다시 운치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신동읍 운치리 254-1. 점재교로 강을 건너고 점재마을에 차를 세운 후 카메라를 챙기고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강이 흐르는 방향으로 20분가량 걸어야 합니다. 쉬운 길은 아닙니다. 좁은 산길을 지나 바위와 돌들이 가득한 강길을 건너니 깎아 세운 병풍 같은 절벽길이 나타납니다. 몇걸음 걷다보니 여기저기서 동강할미꽃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본 것들 중 가장 동강할미꽃답게 절벽에서, 무리로 혹은 혼자서 도도하게 하늘을 향해 피어 있습니다. 절벽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니 위험한 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절벽 위로 올라가게 되네요. 동강할미꽃은 지난해 죽은 묵은 잎들을 아래에 두고 피어납니다. 혹시라도 사진을 찍게 된다면 절대 그 묵은 잎을 떼어내서는 안됩니다. 묵은 잎들은 새벽이슬을 머금어 수분과 영양분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요.

동강이 고향인 동강할미꽃은 석회암 토양에서 자라야 합니다. 고향을 떠난 동강할미꽃들은 여전히 고향의 굽이굽이 흐르는 동강과 가파른 절벽을 그리워하며 살겠지요. 다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내내 그 기억을 양분 삼아 오늘을 버틸 겁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세상에 베인 마음 잠시 다독여줄 유년의 기억이 있다는 것은 하루가 힘들어도 또다시 아침에 일어나 웃으며 양말을 신게 해주는 힘이 아닐까요. 동강을 지키는 동강할미꽃처럼 저도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뿌리내릴 날이 오겠지요. 가만, 고향이 어디라고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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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김도웅 기자 pachino8@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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