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60) 구월산(상)

입력 : 2021-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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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지 못한 며느리 록지, 시댁 떠나

황해도 사는 어릴 적 친구 찾아가는데…

 

유 진사의 며느리 록지는 석녀(石女·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맞았다. 혼례를 올린 지 3년이 지나도 아기를 갖지 못하자 집안의 대가 끊어진다고 시어미가 난리 쳐 신랑이 첩을 얻었다. 몇달 만에 첩이 입덧을 한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달이 차자 아들을 낳았다. 유씨 집안에 삼대독자 핏줄을 잇게 된 것이다.

록지의 위상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은근한 압박이 피부로 느껴지자 첩에게 안방을 물려주기로 했다. 록지가 시아버지에게 큰절을 드리며 마지막 인사를 올리자 유 진사가 록지의 두손을 잡고 눈물을 보였다. 시집 유 진사댁도 평양에서 알아주는 양반 대가지만 친정 오 대인집도 시집 못지않은 명문가다. 록지는 시집과 친정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소리 소문 없이 장옷을 깊이 쓰고 평양을 빠져나갔다.

록지 나이 이제 스물둘!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갈까? 땅거미가 지는 평양성 밖 주막집 객방에서 벽에 기대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아 저고리 앞섶이 다 젖었다. 한식경이나 머릿속이 먹물처럼 엉키다가 ‘그래, 운명의 쪽배를 타는 거다. 운명! 흘러가는 대로 가는 거야’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탁배기 한병에 안주를 시켰다. 자작 석잔에 픽 쓰러졌다.

이튿날 남장(男裝)을 했다. 여자가 홀몸으로 돌아다니기에는 아무래도 남장을 하는 게 나을 듯해서다. 초립에 조끼를 입고 바지 정강이는 노끈으로 묶었다. ‘다른 사람 눈에 남자로 보이겠지’ 하는 건 록지의 생각이고 반듯한 이목구비에 백옥 같은 살결, 야들한 손은 누가 봐도 여자다. 록지가 가려는 곳은 구월산 자락 황해도 은율이다. 어릴 적 이웃 친구가 그곳으로 시집가 실낱같은 연고라도 만들겠다고 은율을 항해 발걸음을 뗐다.

몇날 며칠을 걸어 남포에 가니 바다처럼 드넓은 대동강 하구가 가로막았다. 황포돛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니 은율이 멀지 않았다. 아침을 챙겨 먹고 주막을 나서는데 주모가 말했다.“봉수고개를 넘을 때는 머릿수가 열다섯이 돼야 관군이 따라가.” 산적이 나올지 모른다고 겁을 줘 다시 주막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을 더 잤는데도 여덟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주모가 매상 올리려고 저러지.” 장돌뱅이 하나가 빈정대며 주막을 나서자 모두 따라나섰다.

온 산이 진달래꽃으로 뒤덮인 고갯길을 오르며 창을 뽑는 사람도 있었다. “엄마야∼” 록지는 폭 주저앉고 남정네들은 두손을 치켜들었다. 소나무에서 산적들이 칼춤을 추며 툭툭 떨어졌다. 큰소리치던 장돌뱅이는 선 채로 바지에 설설 오줌을 쌌다. 돈과 쓸 만한 물건만 빼앗고 모두 풀어주는데 산적들이 키득거리며 록지만 둘러쌌다. 가슴을 만져보는 놈, 엉덩이를 주무르는 놈, 록지는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눈을 가린 채 막대기를 잡고 온종일 걸어가는데 소쩍새 소리가 들려 밤이 깊은 줄 알았다. 가다가 암호를 외치기에 초소를 지나는 걸 알았다.

마침내 눈가림 막을 벗기자 말로만 듣던 산채다. 그 악명 높은 구월산 산적 소굴에 온 것이다. 록지는 깜짝 놀랐다. 한마을처럼 산채가 넓었다. 움막만 있는 줄 알았더니 비록 초가지만 번듯한 집도 있었다. 여기저기 불빛이 반짝였다. 맨 위쪽 너와집에 록지를 넣었다. 아직 산속 밤은 싸늘한데 너와집 온돌방은 따뜻했다. 운명에 몸을 맡겨서일까. 별로 겁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술 냄새를 풍기며 덩치 큰 남자가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록지를 쓰러뜨렸다.

“웬 여편네가 바지를 입었어? 너 사당패야?” “으아∼악” 록지가 고함쳤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괴상한 짓거리에 록지는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고통과 쾌감은 양면이라 했던가. 아침이 밝았을 때 록지는 발가벗은 채 털보 품에 안겨 있었다.

이상했다. 록지는 십여년을 함께 산 서방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충만감에 온몸이 녹아내렸다. 술이 깬 산적 두목은 적이 놀랐다. 빼어난 미인일 뿐 아니라 얼굴에 기품이 서려 있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도 있었다. 록지도 옷매무새를 여미며 산적 두목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텁수룩한 수염 속에 감춰진 귀골 상을 보게 되었다.

보통 여인네를 납치해와 두목이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밑으로 보내 이 산적 저 산적이 해우(解憂)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뿐만 아니라 사흘 후 아예 혼례식을 올렸다. 산채에서 기르던 돼지를 두마리나 잡고 술독이 바닥났다. 록지는 신방에서 새신랑을 기다리며 들창 위에 걸린 초승달을 보고 기도했다. “천지신명님이시여, 고맙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신랑이 들어왔다. 너와집이 흔들리고 록지는 태산 같은 새신랑 품에 안겨 꿈나라로 갔다.

호사다마, 그날 새벽 은율 관아에서 관군이 기습해왔다. 산채는 불바다가 되고 피바다가 되었다. “임자는 납치돼 온 사람이니 아무 문제가 없을 거요.” 새신랑이 무쭐한 주머니 하나를 록지 손에 쥐여주고 으스러지게 껴안더니 들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록지는 관군에 구출(?)되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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