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56)얼레지

입력 : 2021-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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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사냥한 장끼 잃어버린 정원사

도승지 기지로 죽을 위기 넘기는데…

 

왕은 원래 사냥을 좋아하는 데다 올봄 들어 부쩍 활솜씨도 좋아졌다. 왕실 사냥터는 여럿이다. 33만여㎡(10만여평)밖에 안되는 작은 것에서부터 231만4000여㎡(70만여평)나 되는 넓은 사냥터도 있었다. 왕의 사냥길에는 문무백관들이 따르는데 동행 무리를 선발하는 사람은 도승지(비서실장 격)와 내금위장(경호실장 격)이다.

춘분이 지나고 간지러운 남풍이 불어와 온 산에 화사한 진달래가 만발하고 오만 잡새가 지저귀자 열흘도 지나지 않아 왕은 또 사냥을 가자고 도승지에게 어명을 내렸다. 이틀 후로 날짜가 잡혔다. 그날 밤 애첩 후궁을 껴안았는데 애첩이 정원사를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다. 애첩은 후원 연회장 옆 연못가 별당에 기거한다. 왕이 연회를 마치고 얼큰히 취하면 바로 연못을 돌아 별당으로 들어간다.

애첩은 꽃을 좋아해, 아니 왕이 화초를 좋아해 애첩이 미끼처럼 기화요초로 오는 길을 수놓는 것이다. 정원사가 사냥길에 따라가 왕의 눈을 홀릴 꽃과 풀을 캐오게 한 것이다.

내금위장이 흑마를 타고 깃발을 휘날리며 앞장서고 왕이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백마를 타고 따라가면 도승지와 백관들이 뒤따랐다. 왕과 내금위장은 안개가 자욱한 봄날 아침 사냥을 좋아한다.

도승지는 그 이유를 알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사냥터 늪가로 삽살개 떼를 풀었다. 컹컹 개들이 풀숲을 헤집자 푸드득 장끼들이 안개 속으로 치솟아 올랐다. 왕이 시위를 당겼다. 핑 하고 화살이 장끼 날갯죽지를 꿰뚫었다. “와∼.” 백관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찔렀다. 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험어험 헛기침을 날렸다. 윤기가 반질거리는 붉고 검은 장끼를 받아들고 왕은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실제로 장끼를 꿰뚫은 화살이 내금위장이 쏜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도승지밖에 없었다.

왕은 망태를 멘 정원사에게 장끼를 던져줬다. 정원사는 정신없이 얼레지를 캐서 바구니에 잔뜩 담고 그 위에 장끼를 얹었다. 왕이 또 한마리 장끼를 잡았다. 또 정원사에게 장끼를 던졌다. 정원사가 깜짝 놀랐다. 장끼 한마리가 없어진 것이다. 개울가에서 즉석 장끼구이로 술 한잔을 마시려던 왕이 불같이 화를 냈다. 버럭, 내금위장의 이단 옆차기에 정원사 영감은 개울에 처박혀 묵사발이 되었다. 칼을 빼들어 높이 치켜들고 정원사의 목을 향해 내려치려는 순간 도승지가 막아섰다. “이놈의 죄가 순식간에 목이 날아갈 만큼 가볍지 않습니다.” 내금위장이 한발 물러섰다. 도승지는 큰 숨을 토하더니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외치듯이 산천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네놈은 세가지 중죄를 졌다. 첫째, 주상께서 손수 잡으신 장끼를 잃어버린 죄. 둘째, 이 죄는 첫째 죄보다 훨씬 무거워 네놈 목은 말할 것도 없고 삼대조상을 부관참시할 죄다. 주상께서 네놈 목을 치고 나서 궁궐로 돌아가셔서 화가 가라앉으시면 까짓 장끼 한마리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전하를 번민하시게 만드는 죄. 세번째, 이 죄는 두번째 죄보다도 열배백배나 무거운 죄다. 소문이 나면 백성들이 주상전하를 하찮은 사냥감 하나 잃어버렸다고 사람 목을 벤 부덕한 왕이라 생각할 것 아니냐. 네놈의 죄를 네가 알렸다!!!”

도승지의 치죄문(治罪文)을 가만히 듣고 있던 왕이 손수 말에서 내려 정원사를 일으켜 세웠다. 문무백관들이 사냥터 풀밭에 꿇어앉아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를 외쳤다. 울음 섞인 소리다. 내금위장의 발차기에 정원사의 아구창이 돌아간 걸 왕이 자세히 보더니 “궁궐로 돌아가거든 어의에게 치료하게 하라”고 도승지에게 명했다

그때 내금위장이 “전하, 상과 벌은 분명하게 펼치셔야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자 “모두 돌아가자” 하고 왕이 큰소리로 외쳐 내금위장의 입을 막았다. 정원사는 광목천으로 아구창을 잡아매고 팔꿈치에는 목대를 댄 채 사냥터에서 캐온 얼레지를 별당으로 가는 길목에 심기 시작했다.

별당의 애첩이 나와 새하얀 팔뚝을 걷고 함께 얼레지를 심다가 정원사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 연유를 묻자 “산에서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라며 얼버무렸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처녀다. 요염하기 그지없다. 이른 봄, 잔설 녹은 물에 깨어난 바람난 처녀는 벌어진 비늘잎 두장 사이로 가녀린 꽃대가 올라와 땅을 보고 고개를 숙이지만 찢어진 보라색 꽃잎 여섯이 발랑 뒤로 젖혀져 벌나비를 유혹한다.

왕이 애첩을 껴안고 엉덩이를 두드리며 “짐의 얼레지”라 흥얼거렸다.

그날 밤도 연회가 파하고 얼큰히 술이 오른 왕의 발걸음은 별당으로 향했다. 왕이 청사초롱 불빛에 요염한 얼레지를 보려고 주저앉는데 오줌 지린내가 확 풍기고 왼쪽 발자국 하나가 얼레지를 짓뭉개버렸다.

왕의 불같은 호령으로 아직 궁궐을 빠져나가지 않은 연회 참석자들의 왼쪽 신발을 모아왔다. 내금위장의 신발이 발자국과 딱 맞았고 신발에 얼레지 꽃잎마저 묻어 있었다.

늦은 밤, 정원사 영감님이 제집 안방에서 벽에 기대어 곰방대를 물고 있는데 마누라가 물었다.

“그 몰골을 하고 무슨 좋은 일이 있어 그렇게 빙긋이 웃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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