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54) 형제(상)

입력 : 2021-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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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초시, 오 처사·꼽추에 전재산 탕진

노름판 들이닥친 아버지 쓰러지는데 …

 

새벽녘에 노름판이 파하자 모두가 우르르 노름방을 나와 장터거리 국밥집으로 향했다. 그날이 제천 장날이라 동이 트기 전부터 국 솥이 설설 끓는데 장꾼들보다 먼저 노름꾼들이 국밥집을 채웠다. 한쪽 구석에는 한발 먼저 온 오 처사와 꼽추, 털보 일행이 벌써 국밥을 뜨기 시작했다.

젊은 노름꾼 변 초시가 등을 돌렸지만 오 처사 일행 가까이 바짝 다가앉아, 귀를 세워 오 처사 일행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어찌 그렇게도 끗발이 오르지 않습니까, 어르신?” 호위무사 털보가 목메어 꼽추를 보고 짜증을 부리자 꼽추는 탁배기 잔만 연신 비우며 입을 닫고 있는데, “여보게 끗발은 탓하는 게 아니야” 하면서 젊은 오 처사가 점잖게 털보를 꾸짖었다. 꼽추의 판돈을 쓸어간 변 초시가 속으로 웃었다.

이튿날 밤 황 생원 집 노름방은 또다시 꽉 들어찼다. 천석꾼 변 진사 아들 변 초시, 약재상 박씨, 금은방 황 노인, 그리고 꼽추. 이렇게 넷이 마작판을 가운데 놓고 바짝 다가앉았다.

열기가 오르자 꾼들은 예민해졌다. 끗발이 고개 숙인 약재상 박씨가 “패를 그렇게 쌓지 마시오” 하고 꼽추에게 시비를 걸자 꼽추도 지지 않고 “노름판이 지저분하네. 억지 부리지 마시오” 하고 되받았다. “뭐라고?” 언성이 높아지자 꼽추 뒤에 산처럼 앉아 있던 털보가 눈을 부라리며 “어험 어험” 헛기침을 하니 박씨가 쑥 들어갔다.

삼경이 지나기 전에 박씨가 나가떨어지고 포목점 우 서방이 들어왔다. 그날도 끗발은 변 초시에게 쏠렸다. 개평꾼과 구경꾼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변 초시 끗발은 화수분이여.” 그날도 변 초시가 싹쓸이를 했다. 열아홉살 변 초시는 열다섯에 초시에 합격해 천재 났다 소리를 들었지만 그 후 대과에 거듭 낙방하더니 이날 이때껏 공부에 매달리느라 꾹 눌러 참았던 쾌락의 늪에 발을 담갔다. 사람들은 부전자전이라 했지만 천석꾼 아버지 변 진사는 주색에는 빠졌어도 노름은 하지 않아 재산을 지켰다.

아버지 변 진사가 마흔에 갓 들어서며 골골하다 병석에 드러눕자 외동아들 변 초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접고 저잣거리 친구들과 어울렸다. 기생집을 들락거리더니 급기야 도박에 매몰되고 말았다. 지난 한해 변 초시가 마작판에 처박은 전답이 백마지기가 넘었다. 올들어 정초부터 끗발이 오르는 데다 어디서 굴러들었는지 어리숙한 봉, 꼽추 일행이 돈을 풀어 일거에 전답 삼십여마지기를 찾았다. 변 초시가 이제 마작에 눈을 떴다고 큰소리치며 판을 키웠다. 오십여마지기를 찾았다. 계속 갖다 바친 꼽추 일행이 기가 죽었다.

변 초시는 꼽추가 손을 털고 제천을 떠날까봐 가끔씩 잃어주는 여유를 부렸다. 꼽추의 뒷돈을 대는 스물 남짓한 오 처사는 그렇게 거금을 날리고도 태연했다.

변 초시가 또다시 판돈을 키우자 다른 꾼들은 가슴 떨려 못하겠다며 물러앉고 풍기 인삼장수와 원주 최 부자 아들이 들어왔지만 실상은 변 초시와 꼽추 단둘의 진검승부가 됐다.

꼽추가 마침내 장풍을 일으켰다. 삼경이 오기 전에 변 초시 판돈이 바닥났다. 이튿날부터는 아예 땅문서가 오갔다. 변 초시는 눈알이 뒤집어져 잃은 재산을 한방에 다 찾을 듯이 판돈을 자꾸 올렸다. 보름이 지나자 천석꾼 부자 변 진사네 재산이 몽땅 꼽추 손을 거쳐 오 처사 품에 안겼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밤 개평꾼과 구경꾼에 둘러싸여 마작 열기가 불을 뿜고 있을 때 ‘꽈당’ 문이 부서지며 변 초시 아버지 반신불수 변 진사가 행랑아범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와 지팡이를 휘둘러 노름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모두가 도망가고 방에 남아 있는 꼽추 일행 중 오 처사를 변 진사가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 “어어어∼” 하며 쓰러졌다. 행랑아범이 달려 나가 의원을 데리고 왔을 때 오 처사가 변 진사를 부둥켜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의원이 침 놓을 틈도 없이 진맥을 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주막에서 탁배기를 마시던 변 초시가 달려와 털썩 주저앉았다.

객사한 변 진사를 둘러업은 사람은 호위무사 털보였다. 밤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빈 장터를 빠져나가 동네 골목을 돌아 변 진사네 집에 다다랐다. 대청에 돗자리를 깔고 변 진사를 눕혀 광목천을 덮었다.

모든 전답 땅문서도, 고래대궐 같은 기와집 집문서도 마작판에 휩쓸려 남의 품속으로 들어갔다는 걸 알아차린 하인·하녀들이 닥치는 대로 살림을 챙겨 도망가고 없어 을씨년스러운 집에는 변 진사의 부인, 안방마님만이 기둥을 잡은 채 몸을 가누고 있었다.

뒤따라온 오 처사와 안방마님의 눈이 마주쳤다. 생면부지의 첫 만남인데 서로 살기가 튀었다. 안채 대청에 빈소가 차려져 오일장을 치르는데 오 처사가 사랑방을 차지했다. 꼽추의 돈줄인 오 처사가 변 초시로부터 전 재산을 낚아챘으니 이 집의 새 주인으로 사랑방을 차지하는 건 그렇다 치고 상복까지 차려입었다. 물론 빈소에서 문상을 받는 상주는 변 초시였다.

변 진사가 노름판에서 객사를 했고 상주 변 초시는 알거지가 됐다는 소문이 제천 고을 바닥에 쫙 퍼져 문상객도 가뭄에 콩 나듯이 띄엄띄엄 왔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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