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51) 양자

입력 : 2021-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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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깊은 잠에 빠진 적막강산. 오줌을 누러 다리 밑 움막을 나온 거지 아이의 눈에 개울 얼음장 위 떨어진 보따리 하나가 희미하게 들어왔다. 다리 위를 지나가던 소달구지에서 쌀가마라도 떨어진 걸까, 다가갔더니 이게 무엇이냐! 술 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니 취객이 다리에서 떨어진 것이다. 북풍한설은 몰아치는데 금방 떨어진 게 아닌 듯 옹크리고 모로 누워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을 만져보니 돌처럼 차가웠다.

움막으로 달려가 할배를 깨웠다. 할배가 그 취객을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모닥불을 피우고 팔다리를 주물렀다. 희끄무레 동녘이 밝아올 때야 취객이 눈을 떴다. “우리 막동이 아니었으면 당신은 얼어 죽었소. 어찌 젊은 사람이 술을 그렇게….” 할배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고∼고∼고맙습니다.” 젊은이는 만신창이가 돼 비틀거리며 움막을 나갔다.

이튿날 사인교 가마를 타고 한 남자가 다리 밑 거지 움막을 찾아왔다. 어젯밤 술에 취해 다리에서 떨어졌던 그 취객이었다. 남자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얼굴엔 시퍼런 멍이 들었고 다리는 절뚝거렸다. 남자의 거듭된 권유로 할배와 막동이는 그를 따라나섰다.

한식경을 걸어서 간 곳은 허억! 고래대궐 같은 천석꾼 부자 민 진사네 집이다. 그가 바로 민 진사였다. 막동이와 할배는 목간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랑방에서 민 진사와 겸상으로 진수성찬 점심상을 받았다.

이튿날 막동이는 민 진사 손을 잡고 서당으로 갔다. “이름이 뭐냐?” 훈장님의 물음에 “오막동입니다.” 그때 옆에 있던 민 진사가 말했다. “민막동이오. 얘는 제 아들입니다.” 훈장님이 막동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몇살이냐?” 일곱살 막동이는 대답을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집에서도 찬모·침모·하녀·하인들이 모두 막동이를 ‘도련님’이라 불렀다. 할배는 행랑아범이 돼 대문 단속을 하고 마당을 쓸었다.

할배와 막동이는 거지로 만나 혈육처럼 됐다. 할배는 행랑방을, 막동이는 사랑채의 책방을 차지했다. 막동이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쪽박을 차고 걸식을 하러 서당 옆을 지날 때 “하늘천 따지…” 글 읽는 소리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눈이 펄펄 오던 날 삼신암에서 백일기도를 마친 안방마님이 집으로 돌아왔다. “막동아, 어머니께 인사를 올려라.” 민 진사의 말에 막동이는 처음 보는 안방마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민 진사가 부인에게 막동이와 할배를 집으로 데려온 연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힐끔힐끔 막동이를 보는 안방마님의 눈초리가 차가웠다.

민 진사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신언서판이 빼어난 데다 천석꾼 부자에 성격까지 유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데 단 한가지, 자식이 없는 게 흠이다. 열일곱에 장가가서 십년이 지났건만 두살 위 색시는 잉태할 줄 몰랐다.

백일기도를 하고 온 덕일까. 안방마님이 헛구역질을 하더니 달이 차자 딸을 낳았다. 민 진사는 금이야 옥이야 딸아이를 안고 살았다. 막동이에게 싸늘한 눈길만 주던 안방마님이 이제 노골적으로 막동이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거지새끼를 양자로 들이다니, 동네 남사스러워 못 살겠네∼” 막동이가 ‘어머니’라 부르면 질색을 해 민 진사가 없을 때는 ‘마님’이라 불렀다.

하루는 동네 여자들이 마실 와 안방 가득 모인 자리에 마님이 막동이를 불러들여 바가지와 숟가락을 쥐여주며 각설이타령을 해보라고 윽박질렀다. 막동이가 울면서 뛰쳐나왔다. 그래도 막동이는 민 진사에게 고자질을 하지 않았다.

고명딸 백일에는 잔치 대신 삼신암에서 무병무탈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하인들이 바리바리 쌀가마다 떡 고리짝이다 옷 보따리를 메고 마님이 탄 사인교를 뒤따랐다. 저녁나절에야 첩첩산중 삼신암에 다다랐다. 승복에 고깔을 눌러쓴 삼신보살이 마님으로부터 고명딸을 받아 꼭 껴안았다. 차려놓은 절밥을 후딱 먹어치운 하인들과 가마꾼들이 땅거미가 내리기 전에 우르르 하산하자 삼신암 요사채엔 고명딸을 안고 있는 보살과 안방마님뿐이다.

“아들을 낳아야 해요.” 마님이 촛불을 끄려 하자 삼신보살이 마님을 끌어당겨 옷고름을 풀었다. 마님이 삼신보살 품을 파고들었다. 삼신보살이 쪽머리 비녀를 빼고 승복을 벗자, 이럴 수가! 그녀는 여장남자(女裝男子)였다. 폭풍이 몰아쳤다.

바로 그때 잠긴 문고리가 뽑히며 문이 꽈당 열리고 번쩍이는 비수를 든 괴한이 방 안에 우뚝 섰다. 눈을 마주친 마님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나는 입이 무겁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요.” 삼신보살의 남근(男根)을 잘라버리고 괴한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삼일 후 할배가 마당을 쓸고 있을 때 사인교가 마님을 태우고 대문으로 들어섰다.

어느 날 막동이가 할배한테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요즘 안방마님이 제게 너무 잘해주세요.” 할배가 말했다. “계속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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