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역사산책] 동생에 떠밀려 즉위한 정종…그 곁 지킨 德妃

입력 : 2019-06-19 00:00
일러스트=이철원

신병주의 역사산책 (19)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 (6)정안왕후 김씨

장자 왕위 계승 원칙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 일으킨 방원, 형을 ‘얼굴마담’ 왕인 정종으로 세워

정종 아내 정안왕후도 44세에 조선 역사상 최고령으로 왕비 책봉

2년 뒤 정종이 상왕 된 후엔 조선의 첫 대비 되는 기록도

정종과 슬하에 자식은 못 뒀지만 사후엔 개성 후릉에 함께 묻혀
 


정안왕후(定安王后·1355~1412년)라고 하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조차 그 이름을 생소하게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남편인 정종(定宗·1357~1419년, 재위 1398~1400년)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정종은 1398년 7월 동생인 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게 왕위에 올랐다. 왕자의 난을 주도한 방원은 태조가 결정한 방석의 세자 책봉이 잘못됐음을 주요 명분으로 삼았다.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원칙인데, 서자(庶子)인 막내를 후계자로 책봉한 부당함을 바로잡는, 불가피한 처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첫째 형 방우의 사망으로 실질적인 장자의 위치에 있던 둘째 형 방과가 왕위(정종)에 오른 것에는 방원의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 방원은 잠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모양새를 갖춘 후, 1400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조선의 세번째 왕이 됐다. 방원의 정치적 야망 속에 ‘얼굴마담’ 형식으로 방과가 왕위에 올랐기에, 그의 아내인 정안왕후 역시 짧은 기간만 왕비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정안왕후는 44세에 왕비가 됐다. 이는 조선의 왕비 중 최고령으로 왕비 자리에 오른 것이다.

정안왕후 김씨의 본관은 경주로, 부친은 김천서(金天瑞)이고, 모친은 담양 이씨 이예(李藝)다. 정안왕후는 1398년 9월1일 세자빈으로 덕빈(德嬪)에 봉해졌다가, 9월5일 정종이 왕이 되면서 덕비(德妃)라 칭해졌다. 이어 11월18일 왕비로 책봉되면서 그녀가 받은 책문에는 다음과 같이 덕과 내조가 기록돼 있다.

“오직 김씨는 단일성장(端一誠莊·단정하고 정성스러운 모습)하고 유한정정(幽閑貞靜·그윽하고 한가하며 곧고 정숙함)하였다. 일찍이 규문(閨門)의 도리를 세워 그 집안사람에게 화합하였으며, 장성해서는 부인의 예의를 닦아 우리 종사(宗事)를 받들었다. 서자인 방석의 난리를 선동할 때를 당하여, 내조를 다해 위태함을 구제하였다.”

1400년 정종이 상왕이 된 후 왕비는 대비로 책봉되면서 조선의 첫 대비가 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대비 책봉 책문에도 “덕비(德妃) 전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성품을 품수하시고, 공손하고 검소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덕행은 안을 다스리는 아름다움을 일찍 나타내셨고, 마음에서 나오는 우애는 친족에게 친교를 두텁게 하는 어짊을 돈독히 하셨습니다”라고 어진 품성의 소유자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정안왕후는 1373년 19세의 나이로 2살 연하의 정종과 혼인해 40년 가까이 해로했다. 하지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정종이 9명 후궁과의 사이에서 17남 8녀를 둔 상황을 고려하면, 그녀는 인고의 세월을 담담하게 지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가 1412년(태종 12년) 6월 58세로 승하하자 태종은 대비의 시호를 정안왕후라 하고 무덤을 개성 인근인 황해도 개풍군에 조성, 후릉(厚陵)이라 했다. 무덤이 개성 근처에 조성된 까닭은 정종 때 한양에서 개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으며 정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안왕후와 개성에서 살았던 점을 크게 고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태종의 생모 신의왕후의 제릉이 인근에 조성된 것도 영향을 줬다. 8월10일에는 정안왕후의 신주를 혼전에 봉안했으며, 8월13일에는 정종이 후릉의 원찰인 개경사(開慶寺)에 가서 묵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숙종 때에는 ‘온명장의(溫明莊懿)’라는 시호를 더 받아 ‘순덕온명장의 정안왕후’라 불리게 됐다.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이 가운데 40기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돼 있다. 2기가 제외된 것은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제릉과 함께 후릉은 북한의 개성지역에 있는 왕릉이다. 후릉 이전에 조성된 태조의 건원릉과 신의왕후의 제릉,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은 모두 단릉(單陵)이라 왕과 왕비가 사후엔 서로 떨어져 있게 됐다. 반면 후릉은 정안왕후 뒤를 이어 1419년 사망한 정종이 이듬해 1월 이곳에 묻힘으로써 조선 왕릉 최초의 쌍릉으로 조성됐다. 비록 생전에 두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지만, 왕릉 형식으로만 보면 정종과 정안왕후의 사후 금슬은 매우 좋다고 볼 수 있다.
 



신병주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KBS <역사저널 그날> 진행 ▲KBS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 진행 중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저서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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