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상호금융, 농민 발목잡던 고리채 타파…농업발전 초석 놓다

입력 : 2019-04-29 00:00 수정 : 2019-04-30 23:54

농협상호금융 100년을 향해 1부 - 상호금융의 역사 (1)태동기

당시 만연하던 ‘연 60%’ 고리사채 해결

이동조합의 자립기반 구축 위해 상호금융 도입은 ‘선택 아닌 필수’

1969년 7월20일 150곳서 업무 개시

조합 합병 박차…2만여개 달하던 조합수 1974년 1545개로 줄어

1973년 ‘농어촌1조원저축운동’ 계기 급성장…1981년 ‘예수금 1조원’ 돌파
 


‘조합원 상호간의 자금융통’.

상호금융(相互金融)의 뜻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상호금융이란 이름에는 1960년대 농촌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9년초 박정희 대통령은 서봉균 제6대 농협회장에게 “농촌의 고리사채를 농업인 스스로, 상호간에 자금융통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당부했고, 상호금융의 탄생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당시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고리사채 문제를 해결하고 이동조합의 자립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상호금융의 도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1969년 7월20일 전국 150개 이동조합에서 상호금융이 처음으로 도입됐다. 당시 한 조합의 창구 모습.


◆고리채 해결의 실마리를 찾다=고금리의 사채, 2만여개의 이동조합. 1960년대 상호금융을 태동시킨 농협 안팎의 상황은 이 두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외적으로는 농촌지역에 만연한 악성 고리채가 문제였다. 당시 농촌에는 농민들에게 자금을 융통해주는 금융기관이 마땅치 않았다. 군조합·이동조합·마을금고가 있었지만, 군조합은 점포가 군청소재지에 위치해 일부 농민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동조합은 군조합 대출 알선 등 제한된 신용사업만 취급했고, 마을금고도 규모가 영세했다.

그렇다보니 농민들은 농촌대금업자나 이웃농가로부터 농사에 필요한 돈을 빌렸다. 그러나 이러한 사채의 금리는 연 3.5~18.5%인 금융기관보다 훨씬 높은 평균 연 60% 정도였고, 이는 농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됐다. 이에 정부는 1961년 ‘농어촌고리채정리령’까지 공포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농협 내적으로는 이동조합의 자립기반 구축이 절실했다. 1961년 8월15일, 구 농협과 농업은행을 통합한 종합농협이 발족하면서 농협은 중앙회와 140개 군조합, 2만1042개 이동조합의 3단계 계통조직을 갖췄다. 그러나 문제는 2만여개에 이르는 이동조합이었다. 이동(里洞) 또는 자연부락을 업무구역으로 하는 이동조합은 조합원수가 100명 정도로 영세했다. 또 신용사업이 제한적인 데다 자기자금을 조성하기도 어려워 조합원을 위한 각종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동조합의 자립기반 구축과 사업 확대를 위해서는 금융업무의 도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금리부터 명칭까지 체계 마련=이러한 농협 안팎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봉균 회장은 관련부서에 제도의 창안을 지시했다. 농협동인들에 따르면 대통령의 당부를 받은 서 회장은 흑판에 ‘相互(상호)’라고 써놓고 며칠을 고민한 뒤 이동조합 합병과 금융업무 실시를 연결해보라고 했다. 이에 따라 해당 부서에서는 외국의 사례를 연구하고 농촌계(契)의 실태를 조사하는 등 한국의 실정에 맞는 제도를 마련해나갔다.

우선 이동조합이 조합원을 대상으로 직접 금융업무를 할 수 있도록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금리체계를 만들었다. 저축을 유도하고 사금융을 흡수하기 위해 예금은 연 40%, 대출은 연 28%로 정했다. 역금리체계로 인한 조합의 손실은 중앙회 자금을 연 9% 저리로 지원해 보전하기로 했다.

제도의 명칭은 협동조합금융으로서의 특징과 상호부조의 전통을 잇는다는 뜻에서 ‘상호금융’이라 지었다. 이렇게 체계를 갖춘 뒤 마침내 1969년 7월20일 군조합에서 추천한 전국 150개 이동조합에서 상호금융업무를 개시했다. 이어 1973년 조합의 상환준비예치금 등을 운용하는 상호금융특별회계와 상호금융사무국을 설치하고, 농협법 개정을 통해 상호금융의 근거 규정을 명문화했다.
 

1969년 도입된 상호금융은 이동조합의 자립기반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합병과 저축운동으로 급성장=상호금융은 이동조합의 합병과 함께 전국으로 확대됐다. 중앙회는 1963년부터 이동조합 합병 4개년 계획을 추진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후 1969년부터 1개 읍·면당 1개 단위조합을 원칙으로 하는 합병을 다시 추진했고, 합병조합에 상호금융과 생활물자사업 등 신규사업을 우선 실시하게 하면서 성과를 거뒀다. 그 결과 2만여개에 달하던 조합은 1974년 1545개로 줄었다. 더불어 상호금융도 1976년 1535개 모든 조합으로 확대됐고, 1969년말 3억원에 불과하던 예수금도 1976년말에는 1559억원으로 증가했다.

상호금융의 성장에는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정부가 추진한 ‘농어촌1조원저축운동’도 큰 역할을 했다. 농협이 주체가 돼 영농적금·계식적금·학생적금 등 저축상품을 개발·보급하는 등 저축운동에 불을 지핀 것이다.

농협 상호금융의 대표상품인 농어가목돈마련저축(1976년)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와 함께 농협부금(1978년), 자립예탁금(1978년) 등 신상품도 개발하는 한편, 내국환업무 취급(1977년), 우편저금 인수(1977년)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나갔다.

이에 힘입어 농협의 상호금융은 급속하게 성장해 1981년 예수금 1조원을 돌파했으며 1982년에는 대출금도 1조원을 넘어섰다. 또 조합의 사업 중 신용사업 비중이 1973년 21.2%에서 1981년 61.2%로 높아졌다. 이는 조합의 자립경영기반 확충으로 이어져 각종 사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됐다. 특히 상호금융을 통해 사채나 계에 의존하던 농가의 여유자금이 제도금융으로 흡수되고, 자금이 필요한 농민들은 제도금융을 통해 융통하는 농촌 금융질서가 뿌리내리게 됐다.

김봉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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