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詩 읽기] 오늘은 의자 생각

입력 : 2022-02-25 00:00

어떤 시들은 읽는 동안 울컥해져서 도저히 갈피를 못 잡고 만다. 이정록 시인의 이 시는 아주 여러번 그랬던 적이 있었던 시임에도 여전히 울컥하고 만다.

<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는 고등학교 시절에 졸업을 앞두고 한 여자친구를 많이 사랑했다. 물론 외모가 헤세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더 사랑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녀가 성악 공부를 하고 있는 여학생이라서였다.

여자친구의 노래를 듣고 싶은데 기회가 적당하지 않자 헤세는 자연스럽게 친구들을 모이게 한 다음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그 자리에서 노래 한곡을 청해 듣기로 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 줄 알았던 여자친구는 무늬만 성악을 공부했지, 타고난 음치였다. 실망한 헤세는 한동안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여자친구를 감싸줘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친구들에게 눈짓을 보냈고 친구들은 모두 별말 없이 그녀의 노래 실력에 감탄한 것처럼 대했다. 사랑하니까. 헤세의 그 마음이 바로 의자였을 것이다.

마음 맨 앞에 둔 사람이 있어 우리는 산다. 그 맨 앞과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마음의 의자는 삐걱거리며 소리를 낼 것이다.

지금쯤 의자 하나 만들기 시작하면 언젠가 시원한 나무 그늘에 놓아야겠다. 그 나무 그늘 아래,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읽다 만 책 한권을 펴 들고는 파래서, 너무 파래서 눈물이 날 것 같은 하늘 아래에서 아주 천천히 구름처럼 즐기는 날이 오겠지.

하루 종일 의자 하나를 생각해야겠다. 그 생각으로 찬 바람도, 걱정도, 또 그리움도 따듯하게 앉혀야겠다.

01010101801.20220225.900043631.05.jpg

이병률 (시인)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