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환 칼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입력 : 2019-10-14 00:00

개도국 졸업할 수밖에 없다면 가격리스크 완충제도 도입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개발도상국 지위 여부는 ‘자기선언’ 방식에 따라 각국이 스스로 결정한다. 우리나라는 이 규정을 통해 개도국 지위를 적용받아왔다. 그렇지만 미국이 올 2월 개도국 지위를 결정하는 4가지 기준을 제시했고, 뒤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 기준에 해당하는 나라는 10월23일까지 개도국 지위포기를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이 느닷없는 소식에 우리 농업계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옛말이 있듯이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현명하게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우선 1995년 발효된 WTO 농업협정에 따라 모든 회원국은 관세·보조금 감축 등을 이행한 후 현재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지금 개도국 졸업을 선언하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농업협상이 타결되고 우리나라가 선진국 규정을 적용한 협정에 서명해야 비로소 개도국 졸업선언의 효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농업협상이 시작되려면 개도국 규정개편을 포함한 WTO 개혁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현재로선 그렇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미국은 18년이나 끌어온 WTO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개도국문제에 막혀 폐기된 상황이므로 중국 등이 개도국 지위를 포기해야 WTO 협상에 돌아오겠다는 입장이지만, 해당 국가들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때문이다. WTO 개혁에 실패하면 새로운 농업협상이 없으므로 이번 선언에도 불구하고 개도국 지위를 졸업할 기회 자체가 없을 것이다.

‘미·중이 전격적으로 WTO 개혁에 합의하고 농업협상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도 있지 않은가’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이미 개도국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우리나라가 새롭게 합의될 기준에 따라 현재와 같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건 무리다. 물론 개도국 규정개혁 없이 새로운 농업협상이 타결되는 예상 밖의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그 경우에는 우리나라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할 수도 있을 텐데 이번 선언으로 졸업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10년 이상 후 미래의 일이 될 가능성이 크고, 그땐 52개국과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에 의해 이미 대부분의 농산물 관세가 철폐된 상태일 것이므로 개도국 지위의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개도국 졸업선언의 실질적 비용은 없거나 적고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차기 농업협상에서는 식량안보에 필수적인 소수 품목을 제외하고 개도국 지위를 적용하지 않을 것’을 적절한 시점에 선언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단,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식으로든 개도국 졸업이 이뤄질 경우 우리나라 농업에 충격을 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이에 대한 농가의 두려움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따라서 개도국 졸업 때 생길지도 모르는 충격에 대비한 보험장치가 필요하다. 미국의 가격손실보상제도(PLC)와 같이 농업의 가격리스크를 완충하는 가격변동대응직불제를 도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책이라고 생각한다.

농업계도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 개도국 졸업약속에 반대하는 것보다 훨씬 실익이 있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된다. 지금이 1930년대 이래 미국 농정의 중심을 이뤄온 가격리스크 완충장치를 우리 농업에도 도입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정환 (GS&J 인스티튜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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