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서대문 시대’ 맞은 농민신문에 거는 기대

입력 : 2017-10-30 00:00 수정 : 2018-03-02 15:26

창간 53돌 맞은 ‘농민신문’ 애독자 성원 속 40만부 돌파 이어 서대문구 안산 자락서 새로운 도약

안산, 서울 지키는 ‘어머니 산’으로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요충지 역할 한양 천도 땐 궁궐 자리 후보로도

농민 속으로, 국민 속으로 파고들어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 견인차로

역사와 시대 아우르는 정론지로 사명 다하며 미래 향해 웅비하길
 


<농민신문>이 올해로 창간 53주년을 맞았다. 아울러 <농민신문>이 애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40만부를 돌파한 것은 임직원 모두의 열정과 노력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농민신문>이 끊임없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시점에 발맞춰 새롭게 서대문 사옥시대를 열었다. 1964년 8월15일 <농협신문>으로 창간 당시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 부속건물이었던 2층 목조건물에서 시작한 것을 기억하면 크나큰 발전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종로1가, 서대문구 미근동, 강동구 명일동 사옥을 거쳐 이제 서울 도심인 서대문구 냉천동 사옥으로 이전해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의 바탕을 마련했다.

이번에 <농민신문>이 이전하는 서대문 사옥은 안산(鞍山·무악산)의 밑자락에 있다. 안산은 서대문구를 대표하는 산으로, 연희동·신촌 일대와 홍제동·천연동·충정로 등 많은 지역에 걸쳐 있다. 해발 295.9m에 정상이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산의 모양이 마치 말이나 소에 얹는 안장인 길마(鞍·길마 안)와 같이 생겼다고 해 안산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무악재(毋岳재)는 안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의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다. 무악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 아이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 해 이것을 막으려는 방편으로 안산을 (서울을 지키는) 어머니 산으로 삼아 무악산(毋岳山)이라 하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한 것이다.

안산은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전달하는 봉수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동쪽과 서쪽 두곳에 봉수대가 있었다. 동봉에 있는 무악동봉수대는 1994년 복원돼 서울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돼 있다. 서봉에도 군부대가 자리해 수도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안산에는 ‘복주물’이라는 약수가 있는데 피부병과 소화장애에 특효가 있고 오복(五福), 즉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有好德)·고종명(考終命)의 하나인 수(壽)를 더한다 하여 복수천이라 했다. 그것이 시대를 거치면서 복주물로 알려지게 됐다. 필자도 어렸을 때 이곳에 소풍 가 복을 주는 물이라 하여 달게 마시던 기억이 있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17일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하면서 천도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처음에는 계룡산 일대를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자는 일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사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관찰사인 하륜이 풍수지리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자 중단됐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 중앙에 있어야 할 것인데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어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륜은 신도읍의 대안으로 한양의 안산을 주산으로 하고 궁궐 자리로 그 남쪽인 연희동, 신촌 일대를 제시했다. 그러나 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한강과 너무 가깝고 폭이 좁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해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궁궐이 들어서게 됐다. 이처럼 경복궁 서쪽 인왕산 건너편에 우뚝 선 안산은 서울의 요충지로서 조선시대 내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구한말에는 자주독립과 자강(自强)의 의지를 담은 독립문이 들어서고, 연세대와 이화여대· 경기대·감리교신학대 등 유수한 교육기관들이 길지인 안산 밑에 둥지를 틀어 지금은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했다.

태조는 1394년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궁궐과 관아를 짓고 종묘사직을 건설했다. 또 성곽을 쌓고 도성을 통과하는 관문인 4대문과 4소문도 조성했다. 4대문의 이름은 자연의 이치인 목금화수토(木金火水土)의 오행(五行)과 인간의 이치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이 조화를 이루는 유교의 천인합일 사상에서 비롯됐다. 4대문은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다. 4소문은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 남소문인 광희문(光熙門), 서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이다.

이중에는 현존하는 것도 있고 복원된 것도 있으며 아예 훼손된 것도 있다. 동대문인 흥인지문만 네글자인 것은 서울의 동쪽이 지세가 낮아 지(之) 자 하나를 더 넣어서 지세를 보(補)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그래서 경복궁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는 무학대사의 주장과 그래도 궁궐을 남향으로 해야 한다는 정도전의 의견 대립, 또 도성 안에 인왕산 선바위를 포함해야 한다는 무학대사의 주장과 유교국가에 다른 신앙의 상징물이 들어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정도전의 갈등 속에서 결국 당시 실세인 정도전의 주장이 채택돼 오늘날 서울이 설계된 것이다.


이제 <농민신문>이 안산 밑자락에 새 사옥을 건립하면서 역사의 새 장을 열게 됐다. 이 근처에 자리 잡은 많은 기관이 연륜을 쌓아가면서 큰 도약을 이뤘듯이 <농민신문>이 진정한 자세로 농민 속으로, 국민 속으로 파고들어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 달성’에 기여하는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으로써 <농민신문>의 사시와 같이 농민의 권익신장과 지속적 농업선도의 역할을 다해 새 농촌문화 창달에 공헌할 것이라 믿는다.

농업은 생명의 근원이고 삶의 원천이다.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얻는 보람과 하늘과 땅에 대한 감사 그리고 인내와 끈기로 이뤄내는 상생과 서로 품앗이하는 공동체 정신도 국민에게 널리 전파해 메말라가는 우리 사회에 산소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로 그 사명이 적극적인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은 기록이고, 역사이고, 소통의 장이다. 먼 훗날 후손들이 <농민신문>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도록 시대의 정론지로서 역할을 다해줄 것을 부탁한다.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미래를 향해 새로운 창의시대를 열어 효율성을 높이고 협동심을 향상시켜 일류 언론의 향도가 되는 웅비의 시대를 열어가기를 기원한다.

이배용 (영산대 석좌교수 (전 이화여대 총장))



이배용 교수는…▲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전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장 ▲<농민신문>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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