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말을 잘 다루는 자는 누구인가

입력 : 2020-01-10 00:00 수정 : 2020-06-25 19:02

18세기 조영석의 ‘말 징 박기’

편자 끼우려 애쓰는 두 사내와 괴로워하는 말의 모습 그려내

화가의 눈썰미와 해학 돋보여 그

림 바깥에 적힌 ‘장자’ 한구절 길들임 속성·이면 돌아보게 해
 

조영석의 ‘말 징 박기(18세기, 종이에 담채, 36.7×2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람만 신을 신는 건 아니다. 논밭을 갈 소는 ‘쇠짚신’을 끼우고, 달리는 말은 ‘편자’를 단다. 굽을 보호하고 미끄럼을 방지하는 게 편자다. 편자에 박는 쇠못은 ‘징’ 또는 ‘대갈’이라 부른다. 그럼 개도 신을 신어야 할까. 겨레의 익은말 속에 답이 있다. ‘개 발에 편자’와 ‘개 발에 대갈’. 둘 다 얼토당토않은 짓거리를 이른다.

말에 편자를 끼우는 작업이 조선 풍속화에 더러 나온다. 그게 손쉬운 노동이면 그림 소재가 되지 않았을 테다. 살아서 설치는 말을 다루는 일 아닌가. 쌓인 경험과 여문 솜씨에 날랜 눈치까지 거들어야 말도, 사람도 탈이 없다. 삿갓과 망건 차림의 두 사람이 지금 그 일을 해내는 중이다. 서로 몫을 나눈 것처럼 짝을 이뤘다. 징을 박는 한순간이 스틸 사진인 양 붙들렸다.

낫과 톱이 앞에 보인다. 오래된 편자를 먼저 빼내고 닳은 발굽을 다듬는 데 쓰는 연장들이다. 새 편자를 박을 때, 말은 두렵고 사람은 조심스럽다. 놀란 말이 발길질을 할까 봐서다. 말을 바닥에 눕히고 나서는 앞뒤 발을 엇갈리게 단단히 묶어야 한다. 그래도 안심이 안돼 한쪽 끈을 잡아당겨 나무에 바짝 동여맸다. 움직일수록 더 조이게 할 심산이다. 때로는 묶은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 요동치지 못하게끔 잡기도 한다.

드러누운 말에 애처로이 눈길이 간다. 말은 목을 비틀고 이빨을 질끈 깨문 채 죽을상을 짓는다. 도리질하다 땅에 부닥칠까 염려돼 가마니를 깔았다. 그런들 새나오는 신음소리를 어찌 막을꼬. 삿갓 쓴 사내가 나뭇가지로 으르며 짐짓 고통을 쫓으려 하는데 그도 안타까운 건 마찬가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황망한 가운데서도 대갈마치를 든 노인은 도리어 신중하다. 편자에 징을 대고 가늠하는 품새가 미덥다. 깔축없이 숙수(熟手)다. 징을 박을 때는 방향과 속도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비끗 기울거나 빼고 박고 거듭하다간 말을 잡는다.

19세기로 이어질 풍속화에 디딤돌을 놓은 조영석의 그림이다. 세속의 자잘한 일상을 파고든 그답게 민생(民生)의 참모습이 고스란하다. 겁에 질린 말의 생식기까지 여실하게 묘사한 눈썰미는 찬탄이 나올 정도다. 다른 사람이 이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마침 이름 모를 문인이 소감을 그림 바깥에 써 붙여놓았다. 그 글이 왠지 생뚱맞다. “말은 발굽으로 서리와 눈을 밟는다. 풀을 뜯거나 물을 마신다. 발을 들어 뜀박질도 한다. 이것이 말의 참된 본성이다. 백락(伯樂)은 어떠했는가. ‘나는 말을 잘 다룬다’고 하면서 털을 깎고 굽을 도려냈다. 열마리 말 중에 두세마리가 죽었다.”

이 얘기는 <장자(莊子)>에 나온 것이다. 갈기와 굽을 고르고 깎아내는 행위는 말의 천성을 해친다고 장자는 나무란다. 말을 감별하고 조련하는 데 능란했던 백락조차 실상 말을 옥죄는 고역(苦役)을 강요했다는 지적이다. 고삐나 굴레나 편자는 길들이는 자의 편의를 돕는 도구다. 말이야 오로지 달갑잖다. 나지막이 화가 조영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세상에 누가 달갑게 길들여지겠는가.”
 



손철주는…

▲미술평론가 ▲저서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흥, 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사람 보는 눈> <꽃 피는 삶에 홀리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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