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꽃놀이가 살풍경이 안되려면

입력 : 2019-04-19 00:00 수정 : 2020-06-25 19:03

짧아서 황홀하고 속절없는 봄 꽃구경에 남녀 안 따진지 오래

화백 이유신의 작품 ‘포동춘지’

복사꽃 핀 개울가를 배경으로 벗과 시 한수 읊고 술 마시며 조용히 봄 만끽하는 모습 담아
 


미세먼지에 배알이 꼬인 꽃들이 한꺼번에 분통을 터뜨렸나. 방방곡곡이 백화제방이다. 이 어지러운 꽃 멀미는 난세의 징조가 아니라 아름다운 요란일 테다. 봄을 누리는 마음인들 지레 한결같을까. 꽃구경도 가지가지다. 때마침 시 잘 짓고 술깨나 즐긴 고려 문인 이규보가 봄놀이하는 작태를 늘어놓은 바 있다. 그 표현이 글쟁이답다.

이유신의 ‘포동춘지(19세기, 종이에 담채, 30×35.5㎝, 개인 소장)’

먼저, 부티 나는 자들의 놀음놀이다. ‘둥둥 북소리에 살구꽃이 활짝 피고, 서울의 고운 봄빛을 바라보면서 왕과 더불어 즐겁게 술잔을 기울인다.’ 끼리끼리 놀긴 해도 품새가 점잖다는 말씀이다. 가관인 것은 질펀하게 노는 패거리다. ‘수레에 노란 저고리 붉은 치마 입은 기생을 싣고, 아무 곳에나 머물러 자리를 깔고 피리와 생황을 울리면서, 벗들과 거나하게 취한 채 붉은 꽃과 푸른 잎을 만끽한다.’ 눈앞에 훤히 떠오른다. 꽃나무 욕보이는 흥청망청 놀음판 말이다.

멀쩡한 사내조차 봄꽃 앞에 서면 왜 앓는 소리를 해댈까. 아무려나 봄이 속절없는 탓이니 어쩌겠는가. 봄은 짧아서 황홀하고, 황홀해서 가뭇없다. 꽃인들 다르랴. 열흘 붉기가 도무지 어렵다. 하여 꽃구경에 남녀 안 따진 지 오래다. 꽃만 보면 엄살이 도지는 시인도 있다. 송나라 왕안석의 토로는 안쓰럽다. ‘땅을 쓸고 꽃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건(掃地待花落·소지대화락) / 그 꽃잎 먼지 묻을까 애처로워서(惜花輕著塵·석화경착진).’ 아끼는 마음도 유만부동(類萬不同·정도에 넘침), 이 정도면 속이 다 간지럽다.

그림 속 이 남자들을 보자. 무리지어 새싹을 밟으러 나왔다가 춘몽에 혼곤히 젖은 모양새다. 오른쪽에 ‘포동춘지(浦洞春池)’라는 제목이 보인다. 성균관 서북쪽에 있던 포동은 이름대로 개울이 흘러 ‘갯골’로 불렸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종로구 명륜동 어름이다. 이웃하던 송동(宋洞)과 함께 갯골은 봄날에 꽃구경하기 좋은 놀이터였다. 봄에 못이 돋보여 ‘춘지’지만 여름에는 물놀이로 왁자했는데, 선비들은 서대문 쪽 서지(西池)로 가 연꽃 보며 가만히 피서했다.

갯골은 복사꽃과 살구꽃이 푸졌다. 다닥다닥 서 있는 꼴로 보면 그림에 나온 꽃은 복사꽃이다. 누워서 보나 서서 보나 봄맞이는 한갓지고 못에 어룽진 물풀은 나른하다. 시 한수에 술 한잔이 돌았겠다. 술에 취하고 시에 홀리고 낙화에 어질한데, 한나절을 비켜가는 노을이 꽃가지에서 출렁거린다. 그림 왼쪽에 적힌 시를 풀어보면 이렇다. ‘물 맑은 포동의 개울 / 꽃 향기로운 포동의 노을 / 시 지으며 술 마시는 풀밭 / 물을 보다 다시 꽃을 보네’

시 맛이 어지간히 심심하다. 하기야 봄은 대충 읊어도 시 노릇 한다지 않는가. 그린 이는 조선 후기를 살다 갔으나 알려진 행적이 드문 이유신이다. 봄은 이내 가고 꽃은 쉬 진다. 꽃놀이 갈 벗을 부르되, 떠들썩한 살풍경은 피하자. ‘장진주(將進酒·술을 권하는 노래)’ 한자락만 깔아도 족하다. ‘푸르른 봄날은 이윽고 저물려 하니(況是靑春日將暮·황시청춘일장모) / 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되어 날리네(桃花亂落如紅雨·도화난락여홍우)’. 아, 술맛 절로 나는 봄, 봄!

 

손철주는…

▲미술평론가 ▲저서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흥, 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사람 보는 눈> <꽃 피는 삶에 홀리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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