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책의 자서전

입력 : 2020-05-08 00:00 수정 : 2020-05-08 23:04

책은 보는 즐거움 있지만 때로는 책 자체도 기쁨 줘 나이 오래 먹은 고서들은 읽은이 흔적 역사로 전해 코로나 시대 많은 기억도 흔적으로 남아 이야기될 것

도서관을 다니는 게 내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봄이면 특히 더 그랬는데, 내가 잘 다니는 동네 도서관이 공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책을 보러 가는 곳이면서 봄이면 꽃을 보러 다니는 산책로이기도 했다.

올봄에는 다 하지 못한 일이다. 꽃은 사진으로 보거나 창밖으로 보고, 길에서 보이는 꽃도 언뜻 보고 말았다. 도서관도 문을 닫았다. 꼭 보고 싶은 책은 온라인으로 신청해 도서관 입구에서 수령할 수 있지만 그건 책을 보는 일일 수 없었다. 서가 사이를 걸어다니며 이런저런 책들을 한가롭게 보는 것. ‘읽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본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리는 일.

아무 생각 없이 서가 사이를 걷다 뜻밖의 책을 발견하게 되는 기쁨은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 중 가장 즐거운 순간이라 할 만하다. 이름을 아는 작가여서, 언젠가 들어본 제목 같아서, 혹은 작가도 모르고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냥 느낌이 좋아서 뽑아 들게 되는 책들. 그런데 그 책들이 내 시간을 그 자리에 그대로 붙들어 놓고 있을 때.

독서의 즐거움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 책의 내용이 주는 기쁨이다. 그러나 때로는 책 자체가 주는 기쁨도 없지 않다. 책의 모양과 질감은 내용을 감싸는 외부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책 자체가 보여주는 역사를 발견할 때도 있다. 나이를 아주 오래 먹은 책은 세월을 거치며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나이를 아주 오래 먹은 책’이라는 말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공공 도서관의 책에 남은 대개의 흔적들은 불쾌감을 낳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 책장에 꽂힌 책에서조차 마찬가지다.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순간의 메모들, 이유를 알 수 없는 밑줄들, 찢어지거나 구겨진 자국들, 심지어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얼룩들까지. 그런 흔적을 없애려면 책을 통째로 버리는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책이 고서의 영역에 이르면 그 책의 흔적은 이야기가 된다. 종이로 책을 제작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 유행을 심히 우려했다는 기록도 있다. 종이의 물질적 특성상 그 수명이 매우 짧을 것이라는 우려였는데, 책의 내용과 책 자체의 보존을 동시에 걱정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로서의 책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일 터다.

오늘날 우리가 손에 잡는 책은 그야말로 무수히 쏟아지는 책들 중 하나이고, 그래서 손쉽게 폐기되고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다. 이야기는 오래 기억해도 책을 기억하는 일은 거의 없다.

책으로 묶이지 않고 사라질 뻔한 이야기도 많다.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의 유고를 모두 없애달라고 아주 강력하게 요청했다. 친구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유언은 자네한테 모든 걸 다 태워버리라는 부탁일세.” 그 편지를 받은 친구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부탁을 거절했다. 남겨져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위대한 책들은 그의 유언조차 무시해버린 친구의 ‘독선’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졌다.

그리고 그 책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번역을 거치면서, 또 책의 판형에 따라 새로운 옷을 입으면서, 각주가 달리고 해석이 붙으면서 다른 향기를 품게 됐다. 거기에 개인의 역사가 묻으면서 또 다른 책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종이 책 이전에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책과 파피루스로 만든 책이 있었다. 황금으로 만든 책도 있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기원전 6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에트루스칸 골드북은 24K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떤 책도 그 원형으로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

원형을 유지하기는커녕 상실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에서 사라진 책들을 기록해 그걸 또 책으로 엮은 스튜어트 켈리는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라는 책의 맺음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상실은 규범이다.’

남는 것은 흔적이다. 서가 사이에 머물 수 없게 된 시간은 잠시 동안의 흔적이 되고, 코로나19 시대의 많은 기억은 다시 또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 책을 먼저 읽어보듯이, 그 책의 표지를 먼저 만져보듯이 조심조심, 신중해지는 요즘이다.



김인숙은…

▲소설가 ▲저서 <모든 빛깔들의 밤> <소현> <안녕, 엘레나> <제국의 뒷길을 걷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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