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기억의 맛

입력 : 2020-01-31 00:00

손으로 글을 옮겨 적으면 연필심이 주는 느낌 등 ‘생생’

연관 기억 떠오르기도

단순 기록 이상의 의미 충분



최근엔 어떤지 모르겠으나 한동안 필사가 유행했던 걸로 알고 있다. 하긴 필사라는 게 굳이 유행을 따르는 일이 아니기는 하겠다. 좋은 글귀를 만났을 때,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을 만났을 때, 빛이 나는 듯한 단어를 만났을 때 그걸 좇아 써보는 것은 타인의 글을 한번 더 기억하는 것을 넘어 내 몸에 새기는 일이기도 할 것 같다. 글은 타인의 것이되 그걸 옮겨 쓰는 순간의 종이와 연필, 혹은 펜, 혹은 자판 위의 손가락, 그런 물질적인 느낌들은 온전히 자신의 것일 터이고, 그 순간과 함께 파생되는 여러가지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리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남의 레시피를 좇아 그대로 만들어도 결국에는 나만의 음식이 되는 것처럼. 나는 요리도 주로 글로 읽는 편이다. 동영상보다 글로 된 레시피를 더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걸 읽거나 보고 있는 게 좋다는 뜻이다. 정말로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들이나 그림을 보고 있어도 좋기는 하지만, 그 음식의 재료와 분량을 하나씩 좇아 읽어나가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주방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 그런 책을 한번 펼쳐보시기 바란다.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외국 음식들, 듣도 보도 못했던 재료들, 이해할 수 없는 계량법들도 맛있거나 재밌다. 음식은 입으로 먹는 맛이 아니라 상상하는 맛이 되는데, 그 맛에 기억이 입혀지는 것은 물론이다. 내가 알고 있던 어떤 맛, 내가 지나온 어떤 순간들.

내 책상 위에는 연필이 잔뜩 있다. 연필로 뭘 쓰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연필을 깎는 일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연필은 자주 뭉툭해져서 자주 깎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때마다 매번 뾰족해지고, 그 뾰족해진 연필심으로 쓴 글자는 새롭다. 매일매일 뭘 새로 시작할 수는 없으니 연필이라도 열심히 깎는 것이다. 그 연필로 원고를 쓰는 건 아니다. 낙서를 끼적이고, 잃어버려도 좋을 메모를 가끔 적는다. 손으로 쓴 것들은 툭하면 사라지는 터라 잃어버리면 안될 메모들은 컴퓨터에 저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손으로 적는 메모라는 것도 내용의 중요도보다는 손으로 쓰는 일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잃어버려도 되는 것들, 잃어버리면 더 좋을 것들. 삭제는 어쩐지 굉장히 단호한 행동처럼 여겨지지만 종이와 함께 사라지는 글씨들은 뭐 그래도 괜찮지 않나, 싶기도 하다.

레시피도 가끔 손으로 옮겨 적는다. 남의 문장, 남의 단어는 옮겨 적는 적이 없는데 레시피는 계량단위까지 꼼꼼히 옮겨 적는다. 옮겨 적으면서 별표를 넣고 그 별표 옆에 메모를 적어놓는다. 반 정도만 넣을 것, 소금을 아주 조금만 더 넣을 것, 10분쯤 더 끓일 것, 이런 식의 메모들. 다시 펼쳐보면 궁금해진다. 반 정도는 반보다 더 넣으라는 건가, 덜 넣으라는 건가. 아주 조금은 어느 정도가 아주 조금인가. 10분쯤은 9분을 말하나 11분을 말하나. 15분은 안되나, 이런 식이다. 기억력은 나빠지는데 손으로 쓴 글은 남아 그걸 쓴 나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음식맛은 매번 다르고, 손으로 쓴 레시피에는 첨가해야 할 내용도 많아지고, 지워야 할 내용도 많아진다. 그리고 그 위에 음식 자국이 남는다. 기억의 자국이라고 해두자.

문자가 처음으로 인류의 기록수단이 됐을 때, 당시 이집트의 왕이었던 타무스는 그 놀라운 진보에 대해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발명품은 사람들 머릿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오. 이제 그들은 기억력을 키우려고 애쓰지 않을 테니 말이오. 문자로 쓴 글만 믿고 자기 안에 있는 기억을 떠올려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오.”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인터넷의 발달로,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사람들은 더이상 뭔가를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그런데 똑같은 우려를 몇천년 전에도 했다는 것이다. 이 우려는 과장된 바가 없지 않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은, 글자를 적는다는 것은, 혹은 자판을 두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억을 하는 일이다. 기억에 기억을 또 한층 얹는 일이기도 하다.

설이 지난 지 얼마 안됐다. 새해 인사 다시 드린다. 모든 분들에게 좋은 맛의 기억만 남는 한해가 되시기를.
 



김인숙은…

▲소설가 ▲저서 <모든 빛깔들의 밤> <소현> <안녕, 엘레나> <제국의 뒷길을 걷다> 등 다수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