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서부전선 이상 없다

입력 : 2019-11-08 00:00 수정 : 2019-11-09 00:13

소설가 레마르크, 작품 통해 어른들이 벌인 전쟁에 끌려가

고통 겪는 소년의 체험 담아내

사람 고갈시키는 현대의 차별 과거 전쟁과 크게 다를 바 없어

어른들의 책임 있는 자세 필요



어느 날 전선의 군인들에게 두배의 급식이 제공된다. 늘 배가 고프던 군인들은 이게 웬 횡재냐 하지만 실상은 횡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전날 전투에서 절반의 부대원들이 죽었고 이들에게 제공된 여분의 급식은 기실 죽은 전우들의 몫이었다. 그래도 난데없이 풍성하게 먹을 수 있게 된 급식에 장병들은 희희낙락하다. 이 장면은 자못 유쾌하게까지 그려진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첫장면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고, 소설이 쓰인 때는 1929년이다. 거의 100년이나 지났으니 세상은 달라졌을까? 어린 소년들을 전쟁에 내몰고, 그 소년들의 꿈을 살육으로 물들게 하던 시대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100년 전보다 더 참혹하게, 혹은 더 수월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죽은 이들은 어제까지는 내 이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살육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전쟁이 일어나는 이해관계,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달라진 것은 오직 디테일뿐이다.

100년 전의 소설은 이제 고전에 속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아주 넉넉한 집이 아니더라도 전집류의 책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 책들을 읽거나 말거나 어쨌든 그런 것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시절이다. 어떤 집은 그런 책들을 꽂기 위해 책꽂이를 사기도 했다. 책꽂이를 먼저 사놓고 나중에 책을 산 집도 있을 것이다. 소위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세계명작들을 나는 대개 10대에 읽었다. 학교에서 권장도서로 권한 이유도 있었겠으나 내 집에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10대에 굳이 읽지 않아도 좋았을 책들도 그 후에라도 반드시 읽을 필요는 없었을지 모를 책들도 그때 다 읽었다.

어떤 책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책은 몹시 야했으며 어떤 책은 견딜 수 없이 지루했다. 단 한구석도 공감이나 감동을 찾을 수 없던 책도 있었다. 그것은 그 책이 읽히는 시기와 관계가 있고 그 책을 읽는 시기와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책은, 혹은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 시대와 함께 변화하고, 혹은 발전하고, 혹은 나이가 든다. 고전을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히는 이유고, 그래서 거듭해서 읽어도 좋은 이유다.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와 겹치는 순간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학교선생의 권유에 이끌려 자원입대를 한, 해버린,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소년의 전쟁 체험기이다. 전쟁과 애국에 대한 환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인생의 목표나 꿈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 주인공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채 스무살도 되지 않았다. 그건 다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는 말한다. “우리가 언젠가 일어서서 우리의 아버지들 앞으로 걸어가 책임을 추궁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할까?” 오래전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과 한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들에게 책임을 추궁당해야 하는 아버지들과 같이 서 있는 기분이다.

‘열린책들’에서 간행한 이 책의 해설에 이런 말이 있다. 레마르크는 이 소설을 “신즉물주의적인 수법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자아의 주장이나 감정의 표현을 억제한 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사실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사실이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실재하는 사실처럼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도 없을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제도·법률·구조·정치·교육, 심지어는 개인적인 관계까지 겉으로 드러나 있는 그 바닥을 파 들어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은 근본적인 차별이다. 벗어날 수 없는 차별이다. 이것은 전쟁과 무엇이 다른가? 전쟁에서는 사람이 순식간에 죽는다. 사회가 구조적으로 고착화시켜버린 차별, 빈부, 교육의 격차는 사람을 서서히 고갈시킨다. 세상은 왜 변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에 대해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우리의 스무살들에게, 그 스무살이 어른이 되었을 때 또 그 뒤를 이을 세대에게.
 



김인숙은…

▲소설가 ▲저서 <모든 빛깔들의 밤> <소현> <안녕, 엘레나> <제국의 뒷길을 걷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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