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에 봉숭아와 개울가에 물봉선

입력 : 2018-09-14 00:00

한민족과 오래 함께한 ‘봉숭아’ 토종식물 아니라며 홀대받기도

물가에 피어나는 예쁜 ‘물봉선’ 그 가치 알아보는 사람 드물어

사물·생명이 지닌 진정한 가치 소소한 부분만으로 규정 말기를
 


태풍 ‘솔릭’이 내륙에 상륙할 것이라는 예고에 수일간 긴장하며 대비했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경기 광릉 국립수목원엔 2010년 내륙을 통과해 불었던 태풍 ‘곤파스’의 흔적들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시 수목원의 많은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지는 피해를 봤다. 그런 모습을 몇년이나 봐왔기에 더욱더 긴장하며 태풍에 대비했던 것 같다. 다행히 별 피해 없이 태풍이 물러가나 싶었는데 폭우가 쏟아져 다시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오랜 가뭄과 폭염 끝에 태풍·폭우까지 겹쳐 올여름은 참으로 요란스러웠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숲에도 성장을 위한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금 겨울을 준비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산책길에 정원 한편에 아직 피어 있는 붉은 봉숭아를 보니, 힘들었던 시간은 다 잊고 와락 반갑다. 그리 지나가길 원했던 유난한 여름이었지만 계절을 보내고 나니 아쉬웠던 모양이다.

봉숭아는 봉선화(鳳仙花)라고도 한다. 꽃의 모양이 정형적이지 않고 머리와 발·꼬리를 세우고 있는 봉황새와 닮아 붙은 이름이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작곡가 홍난파의 유명한 가곡 <봉선화>는 그가 1920년 <애수>라는 곡명으로 악보를 발표했고, 이후 김형준이 악보에 가사를 붙여 탄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노래가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널리 퍼진 것은 20년이 지난 뒤다. 김천애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발표회에서 ‘앙코르’ 요청을 받자 그녀는 어머니가 보내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이 노래를 불렀고, 그게 청중의 심금을 울리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봉숭아를 심었던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헌은 물론 많은 시와 그림에도 등장한다. 오래전부터 이 꽃은 주로 울타리 밑이나 장독대 근처에 심었는데, 꽃이 곱기도 하지만 붉은 꽃이 나쁜 기운을 쫓는다고 해 벽사(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로 이용됐다. 또한 이 식물이 관절통·사마귀·피부염증 치료나 뱀·벌레에 물렸을 때 쓰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균을 막는 효과도 있지 않나 싶다.

이런 봉숭아에 대한 느낌은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로 시작하는 가수 현철의 노래 <봉선화 연정>에서 나라 잃은 슬픔이 여인에 대한 마음으로 바뀐다. 톡 하고 터질 것만 같다는 가사는 열매의 특징에서 나온 듯하다. 봉숭아는 씨앗을 보다 멀리 퍼뜨리기 위해 열매가 익으면 작은 자극에도 톡 하고 터지며, 그 탄성에 의해 씨앗을 멀리 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봉숭아와 같은 집안의 식물 모두가 갖는 특징 중 하나로, 이 집안 식물을 통칭하는 속명이 ‘참을 수 없다’는 뜻의 임파티엔스(Impatiens)이고, 별명이 ‘터치 미 낫(Touch me not)’인 것도 이 때문이다.

길고 긴 세월 동안 우리와 함께 지내왔던 봉숭아는 우리나라 식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원산지가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자생하지 않아 일부러 심은 식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생각해보면 곳곳의 봉숭아는 누가 심지 않아도 지난해 터진 씨앗에서 올라와 자란다. 이렇게 봉숭아를 만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땅에 정착한 식물로 인정하지 않는다. 15세기 전후 밭작물과 함께 들어온 냉이는 누구나 우리 식물이라고 너그러이 말하면서도 봉숭아에는 인색한 것이 내겐 이상하다.

우리 땅에서 진짜 자생하는 봉숭아 집안 식구들도 있다. 물봉선이다. 물가에 피는 봉선화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산 계곡의 아래쪽 도랑과 이어지는 즈음에 가면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양의 물봉선이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 오래도록 피어 있을 것이다. 봉숭아에 인색한 우리는 물봉선에는 무심해 이 개성 넘치고 멋진 우리 꽃 이름도 모르고 알아보지도 못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갖는 가치들은 때론 참 편향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한 생명 혹은 한 사물이 가지는 진정한 본질과 가치·의미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지극히 소소한 부분만으로 규정지어버리곤 한다. 심지어 사람에게도 말이다. 이 여름이 가는 길목에서 울 밑 봉숭아와 개울가 물봉선이 내게 해준 이야기다.

 


 

이유미는…

▲국립수목원장(산림청 개청 47년 이래 첫 여성 고위공무원) ▲저서 <우리 나무 백가지> <한국의 야생화>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내 마음의 나무 여행>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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