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필의 귀거래사] 국민이 함께해야 농업과 농촌이 산다

입력 : 2020-11-23 00:00

‘농업인의 날’에도 농민 한숨뿐

약 28조원 공익적 가치 갖지만 농촌 대부분 소멸위험지역 전락

안정적인 소득 기반 구축하고 농민 자긍심 갖게 국민 협조를

 

11월11일은 ‘제25회 농업인의 날’이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체제 출범으로 어려움에 처한 농민들의 사기 진작과 농업·농촌의 중요성을 기리기 위해 1996년부터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날 기념식을 하고 우수 농민을 선발해 표창하며 농민의 수고를 위로하는 행사를 해오고 있다. 이번 농업인의 날 행사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서 “농촌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고 농업은 우리의 생명이며, 농민은 우리의 어머니고 아버지”라며 “농촌이 잘살고 농민이 자부심을 갖는 나라로 반드시 만들겠다”고 했다 한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만 늙고 지친 우리 농업·농촌의 현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농민이 이 말에 공감하고 위로를 받을지 모르겠다.

그날은 마늘밭 비닐을 덮고 가을에 심은 나무의 월동 채비를 하느라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지났다. 해질 무렵에 밭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지나가던 이웃 농사꾼과 애일당(愛日堂)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나보다 서너살 위인 그 형은 논농사와 고추·마늘 농사를 짓는데 트랙터 두대에 콤바인이며 벼 건조기까지 갖추고 동네일까지 도맡아 하는, 이른바 전업농으로 성공한 모범 농사꾼이다. 오랜만에 마주 앉는데 제멋대로 자란 희끗희끗한 수염, 햇볕에 그을린 검붉은 얼굴, 풀물이 밴 손으로 안주 부스러기를 집다 말고 “닦는 흉내라도 내야지”라며 흙 묻은 바지에 쓱 문지르더니 계면쩍은 표정을 짓는다. 농업인의 날이라 축하를 한다지만 마음 편히 쉬는 농사꾼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1960∼1970년대만 해도 농사를 많이 하는 집이면 일년 단위로 고용하는 ‘머슴’이 한 마을에도 몇명씩은 있었다. ‘촌(村) 부자, 일 부자’라고 365일, 하늘에 해가 뜬 날은 허리 펴고 쉬지 못하는 게 머슴들의 일상생활인데 의성지방에는 음력 7월 중순 세벌논메기가 끝나면 ‘풋구먹이 한다’라고 머슴들이 쉬는 날이 있었다. 이날 주인집에서는 술과 감주를 빚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솥뚜껑에 찹쌀가루로 차노치를 부쳐 일꾼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일꾼들이 힘을 내 열심히 일을 해야 모두가 걱정 없이 또 한해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식량안보의 취약성이 노출되면서 농업·농촌 그리고 농민들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오랫동안 농업은 국민의 먹거리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환경과 농촌경관을 보전하고, 지역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연간 약 27조8993억원에 이르는 공익적 가치를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대부분의 농촌은 소멸위험지역으로 전락하고 있다. 식량자급률이 떨어져 식품의 안정적 공급 역할이 무너지고 농촌인구가 계속 줄어들면 공익적 가치에 대한 주장도 설득력을 잃고 국민생활은 더욱 불안해질 것이다.

1798년 12월초 농업의 진흥방안을 묻는 정조(正祖) 임금의 질문에 정약용은 ‘응지논농정소(應旨論農政疏)’라는 답 글에서 “농업에는 일반 직업과 같지 않은 세가지가 있는데 존경받기로는 선비만 못하고, 이익은 상업보다 못하며, 편안하기로는 공업보다 못하다는 것”이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를 편리하도록 하고(便農·편농), 소득이 되도록 해야 하며(厚農·후농), 농사짓는 사람을 대접해줘야 한다(上農·상농)”는 세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2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문제도 해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개발과 생산 기반 정비, 기계화와 정보통신기술(ICT)로 편리하게 일하는 여건을 만들고, 융복합사업 등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구축하고 전문 직업인으로서 농민들이 용기와 희망·자긍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현직에 있던 2015년 농업인의 날에는 농업·농촌의 가치와 비전, 농업과 교육·문화·복지·환경 등 관련 부문과 연계하고 실천하기 위한 ‘국민농업헌장’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헌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년 농업인의 날 행사는 국민들이 농민들의 수고를 위로하고, 농민들은 소비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는 축제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농촌이 잘살고 농민이 자부심을 가진 나라’가 되려면 국민의 이해와 협조, 그리고 농업계 스스로 변화와 혁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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