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필의 귀거래사] 무엇을 거두고 어떻게 갈무리할 것인가

입력 : 2020-10-26 00:00

01010102201.20201026.900004801.05.jpg

추위 오면 더위는 물러가니 가을걷이 후 저장하는 계절

올해 농사 유난히 힘들었지만 내년 기대하며 들판마다 분주

더 춥기 전 책임·도리 챙길 터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자욱하고 사원제(思源齊) 지붕에 하얗게 무서리가 내렸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시원한 그늘을 찾았는데 햇살이 드는 양지쪽으로 자꾸 눈길이 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당 여기저기에 국화꽃이 얼굴을 내밀고 담 밖 감나무에도 노르스름하게 감들이 익어가고 있다. 서리 오기 전에 거둬들여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땅콩과 고구마·참깨는 벌써 수확했고, 엊그제는 벼를 탈곡해 집에서 먹을 양식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말리고 있다. 이제 마늘을 심고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하면 금년 농사는 얼추 마무리될 것이다.

‘추위가 오면 더위는 물러가니, 가을에는 거둬들이고 겨울에 저장한다’는 천자문(千字文) ‘한래서왕 추수동장(寒來暑往 秋收冬藏)’의 계절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다 흩어진 국론으로 온 국민이 고통을 받는 중에 긴 장마와 태풍까지 겹쳤으니 시골까지 뒤숭숭하기 짝이 없다. 무더위와 함께 이 모든 근심 걱정이 물러가고, 추운 가운데서도 서로 격려하며 희망의 불씨를 살려 따뜻하고 행복한 겨울을 맞이하고 싶다.

원래 ‘한래서왕’이란 공자가 쓴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오니, 춥고 더운 것이 서로 밀면서 한해를 이룬다’는 문구에서 유래하였다. 계절의 변화는 물론 세상만사가 한번 추우면 다음에는 따뜻한 날이 순환 반복된다니 어려운 가운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이야기인가?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추수동장’도 <주역>에 기초하지만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의 ‘무릇 봄에 나서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둬들여서 겨울에 씨앗을 갈무리하는 것이 하늘의 도리인데, 이를 어기면 천하의 기강을 세울 수 없다’는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마천은 중국의 고대 역사를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정리한 <사기>를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곤경에 처한 장수를 변론하다 임금의 눈 밖에 나서 궁형이란 벌을 받고 죽기보다 더 치욕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그렇게도 목숨이 아까웠던 것일까? 아니다. 세상을 한탄하다 말고 분연히 일어나 삼황오제에서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의 통일 이후 한나라까지 2000여년의 어지러운 역사를 정리해 <사기>를 펴냈다. 나라의 흥망과 인간의 도리를 밝히고 아버지의 유업이자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던 것이다.

고금을 통해 슬프고 고독한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분발해 아름다운 결실을 남긴 사례가 어디 사마천뿐이랴? 멀리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생한 후 <춘추>를 지었으며, 손빈은 다리를 잘리고 <손자병법>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산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 끝에 <여유당전서>를 쓰고, 추사 김정희는 쓸쓸한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렸으니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비로소 삶의 이치를 깨닫고 마음에 쌓였던 울분을 잘 갈무리해 불후의 명작을 남긴 것이다.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임금은 임금대로, 신하는 신하대로, 농사꾼은 농사꾼대로 각자 해야 할 일이 있고 거기에 따르는 도리가 있게 마련이다. 농사꾼으로서 올해 농사는 여느 해보다 힘들었다. 이른 봄의 예기치 못한 추위와 여름의 긴 장마에 겹친 병충해, 가을의 태풍으로 복숭아며 살구·자두 같은 과실과 참깨며 고추 등 밭작물, 심지어 집에서 먹으려고 몇포기 심었던 수박과 참외까지 제대로 된 수확물을 얻을 수 없었다. 유난히 흰잎마름병과 혹명나방이 창궐한 벼농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늘은 작황은 괜찮았지만 값이 떨어져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래도 내년엔 다를 거라며 마늘 심는 준비로 온 들판이 분주하다. 땅을 깊이 갈아 퇴비를 듬뿍 넣은 후 좋은 씨앗을 심고 비닐을 덮어 정성껏 가꿔야 우수한 품질의 의성마늘을 얻을 수 있다.

세상 이치도 농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2500년 전 후계자문제로 자식과 신하들이 뒤엉켜 싸우는 통에 골머리를 썩이던 제나라 경공(景公)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며 각자의 도리를 다하도록 일렀다.

거두고 갈무리해야 할 것이 모두 같을 수는 없지만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맡은 바 자신의 책임과 도리를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