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초급 한국어

입력 : 2021-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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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나 물처럼 언어도 당연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결코 거저 주어지지는 않는다. 부모에게 처음 말을 배운 이후 학교에서 차곡차곡 국어 실력을 쌓는다. 친구들 사이에서, 혹은 일하면서 배운 ‘사회어’로서의 우리말은 저마다의 삶을 반영한 채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문지혁 작가의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는 작가의 유학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미국 뉴욕에서 대학원을 마친 주인공 지혁은 현지의 한 대학교에서 초급 한국어 강사로 일하게 된다. 아들의 졸업식에 못 오게 했다고, 방학 때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는 엄마를 전화로 달래며 지혁은 설레는 마음으로 첫 직장에서 한국어 강의를 시작한다.

첫날, 한 학생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 길다며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지혁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뜻을 불쑥 말한다. “Are you in peace?(당신은 평화 속에 있습니까?)” 지혁의 답변을 들은 학생은 일상에서 정말 그런 말을 하느냐며 영화 <스타워즈> 속 등장인물인 ‘요다’가 할 법한 말 같다고 대꾸한다. 학생들은 웃는다.

지혁은 사람들이 무심코 주고받는 인사말 속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며 우리가 인생에서 얼마나 큰 평안을 바라는지 새삼 깨닫는다.

그러다 지혁은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평소에 연락이 통 없던 여동생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는 무언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 오랜만에 듣는 여동생의 목소리로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어머니는 쓰러졌고, 당장 회복할 수 없는 환자가 됐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여동생에게 맡긴 채 타향살이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지혁은 어린 시절 생각에 잠기고, 그러다 오래 사귀다가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질긴 인연을 떠올리기도 한다.

다른 언어보다 훨씬 어려운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초보 학습자에게 구개음화나 ‘은, 는, 이, 가’의 조사 활용법 등을 가르치면서 지혁은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모국어의 생경함을 경험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언어를 통해 항상 상대방의 평안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는 현실을 느낀다. 상대방, 가족의 안녕을 바라는 것은 그래야만 내가 안녕하기 때문이 아닐까. 회복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힘들어하는 여동생, 비정규직 직장의 현실, 누군가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어려움 속에서 ‘나의 안녕’을 찾는 것이다.

캐나다 유학 시절,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도 깊이 공감했던 소설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타인에게는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가 <단어의 사생활>에서 말하듯,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사용하는 말과 글에 고유한 언어의 지문을 남긴다. 따라서 누군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되짚으면 그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 내 삶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거울에 그대로 비칠 것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려면 나의 언어를 누군가에게 가르치듯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곧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라는 한국어 제목의 영화가 당당하게 여러 부문의 후보에 올라 있다. <오페라>로 단편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오수형(에릭 오) 감독의 다음 작품은 <나무>라는 한국어 제목이란다. 모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국민의 자존감을 높여주듯, 내 삶이 반영된 내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나의 자존감을 높여줄지도 모르겠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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