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그리운 거짓말

입력 : 2021-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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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아침, 내가 출연하는 TV 프로그램 출연자 단체 대화방에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호주 대통령, ‘한국인, 호주 방문 시 환전할 필요 없어(종합)’”라는 제목이었다. 이런 조치는 빠르면 올 9월부터 시행된다고 했다. 조치가 시행되는 이유는 한국인들이 즐겨 입는 바지에 ‘호주머니’가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 어딘가 이상해 자세히 보니 호주 대통령이라는 사람 얼굴이 테리사 메이 전 영국 총리였다. 호주머니를 ‘호주 머니(Money)’로 활용한 일종의 말장난이었던 셈. 나는 그날이 만우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모처럼 웃었다.

웃음을 나누고자 다른 단체 대화방에 그 기사를 옮겼다. 그런데 웃자고 퍼 나른 그 기사에 대한 반응에 조금 슬퍼졌다. 대부분은 무응답이었고 몇몇은 “정말?” “빨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끝나 호주에 가고 싶다”는 등 진지하게 반응했다. 시사에 밝은 한 사람은 “메이가 언제 호주 대통령이 된 거죠? 하긴 호주가 영국령이긴 하다”면서 예상치도 못한 상식을 뽐냈다. 무엇보다 슬펐던 것은 그날이 합법적(?)으로 거짓말을 해도 면죄부가 주어지는 만우절임을 의식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만우절 때 중국집에 자장면 서른그릇을 주문하거나 경찰서나 소방서에 장난전화를 거는 소동도 벌어졌다. 누군가에게는 심한 장난이긴 했지만 그래도 엉뚱하고 기발한 거짓말로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여유가 그때는 있었다. 미국이나 영국 등 해외 신문도 만우절에는 노란색 종이에 따로 “우주인이 나타났다”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물건에서 역사를 뒤바꿀 자료가 나왔다”는 등의 기사를 유난히 진지하고 심각한 논조로 쓰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오늘 전학을 가게 됐다”고, 직장 다닐 때는 상사에게 “사직하겠다”는 등의 장난을 쳐서 도대체 언제 철들 거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실없는 농담, 하얀 거짓말이 만우절의 낭만이었다. 누가 더 기발한 거짓말을 하느냐로 재치를 뽐내기도 했다.

이제 ‘낭만’이란 단어는 가상세계에서나 찾아야 할 것 같다. 중고시장에서조차 찾기 힘들 만큼 희귀한 단어가 됐다. 사회가 너무 각박해져 유머를 나눌 여유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요즘은 도처에 너무나도 많은 가짜뉴스가 판친다. 정치인이나 공직자들도 다들 뻔뻔하게 수시로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렇다보니 국민이 거짓말에 염증이 나버린 것일까. 만우절이란 날 하루에만 특별히 면죄부를 주기도 힘들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숨 쉬는 것 빼고 다 거짓말이라면서 서로 비방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말 가운데 돋보이던 하얀 거짓말, 엄혹한 상황에서 누군가 슬쩍 던져 숨통을 틔워주던 농담이 그립다고 푸념했더니 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민간인이 거짓말하면 금방 고소당해요. 그리고 가족들에게 농담을 자꾸 하면 선배 나이엔 치매 환자로 몰린다고요. 그리고 ‘나 때는 만우절에 이랬다’는 이야기도 어디 가서 하지 마세요. 주위에서 꼰대 취급당하기 십상이에요.”

만우절에 사표를 낸다니까 “오늘은 바쁘니 내일 내라”고 농을 받았던 선배는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실까. 생각해보니 그리운 건 만우절 낭만보다도 내 시답잖은 장난에 흔쾌히 웃어주던 이들이었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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