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아름다움이 우리 일상을 바꾼다면

입력 : 2021-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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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설 다음날 좋아하는 친구 마영범의 부고 소식을 받았다. 믿기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손쓸 틈 없이 죽음을 맞았단다. 아직 그는 젊은 나이였다.

디자이너인 그는 한국적 정서를 담은 인테리어로 서울의 앞서가는 동네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한옥의 서까래를 천장에 매다는가 하면 장지문에 한지로 은은한 조명효과를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낡은 전통을 그저 복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격조 높은 세련됨으로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미학을 선보였다. 모두가 최신 유행을 따를 때 우리네 공동의 기억 한자락을 꺼내놓은 안목은 멋졌다. 외국 것을 베끼고 섞어 그럴듯한 분위기만 내면 좋은 인테리어로 통용되는 모습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가 꾸민 공간에서 유난히 안락하고 따뜻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내 것의 익숙함 때문이었다. 그는 또 다른 디자인 작업에서 옛 소반을 작게 만들어 언제나 쓸 수 있게 했다. 앙증맞은 사이즈 때문에 어디라도 놓을 수 있어서 태블릿PC 등 모바일 기기를 이용할 때 편리하게 사용된다. 게다가 자태가 유려한 소반은 용도를 뛰어넘는 아름다움까지 보여준다. 이밖에 자개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수납 상자도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전통만 고집하면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 옛 물건의 쓰임새가 현대인의 삶의 습관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다른 물건과도 조화롭지 못해서다. 하지만 새로운 쓰임새를 발굴한다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낡고 오래된 장롱과 자개장을 끄집어내 세련된 공간에 일부러 ‘툭’ 놓아둔 시도는 전통의 재발견이라 할 만했다. 원래 용도 대신 카페에서 찻잔을 넣거나 가게에서 상품을 진열하는 매대로 썼더니 옛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것을 보면서 옛 기억을 소환하는 나이 많은 이들도, 당최 그런 것을 본 적 없을 젊은이들도 모두 열광했다. 요즘 이런 작업을 따라 하는 이들이 많아졌는데, 그 출발점에 마영범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의 첫 시작은 대개 평탄치 않다. 남들이 하지 않는 짓을 벌인다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콘크리트와 유리로 채운 도심 한복판의 건물에 황토담장을 둘렀다. 심지어 여기에 첨단기기를 파는 매장을 만들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조합이지만 흙과 돌의 존재감이 어떤 것보다 돋보이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내세울 가치, 한때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오래갈 만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고민한 결과다.

그는 작업을 할 때 일상 속 물건이 우리 삶을 바꾼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좋고 아름다운 물건과 함께하는 일상은 우리 자세를 바꾸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사는 모든 이들의 취향이 기품과 격조로 채워지길 바랐을 것이다. 마영범의 말을 다시 빌리면, 어떤 물건을 쓰는지가 우리 일상을 바꾼다. 격조 높은 물건을 쓰면 일상이 풍요로워진다. 자부심을 가질 만한 우리 옛것이 현대의 인테리어에 녹아들고 아파트 설계에 반영된다. 이렇듯 일상의 사물과 공간에 빼어난 아름다움이 더해진 결과, 우리의 삶은 조금일지언정 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물건을 디자인하고 제안하는 사람의 안목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다. 이런 디자이너는 말뿐인 정치인들보다 몇배는 더 훌륭하다.

넘치는 시대에 외려 내면은 빈약해지는 세태를 못마땅히 여긴 친구여, 평안하게 잠드시게.

윤광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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