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넘어가지 않습니다

입력 : 2020-07-31 00:00


초등학교 때 책상에 줄을 긋고 짝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던 시절이 있었다. 내 짝은 일기장에 그 일을 적었고, 나는 그 일기장을 본 담임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나도 일기장에 내 입장을 썼다. 그렇게 책상 위의 가는 선으로 짝과의 물리적·심리적 관계가 결정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것이 ‘관계’라는 데 모두 동의할 것이다. 가정·직장·사회에서 관계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이 빚어진다. 단지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과 조직, 나라와 나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재난의 순간에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엄청난 불편을 실천하면서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또 그 관계를 위해서는 경계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깨달았다.

이승우 작가의 단편소설 <넘어가지 않습니다>는 관계와 경계를 결정짓는 사회의 시선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동거남의 폭력에 시달리다 친구의 전원주택에 혼자 머물게 된다. 사흘째 되던 날, 집 주변을 맴도는 이상한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담장에 붙어 중얼거리면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문다. 며칠 이런 이상한 행동이 계속되자 주인공은 그 남자가 동거남이거나 동거남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아닐까 싶어 급기야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에 잡힌 그 남자는 왜소한 몸집에 검은 피부를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내내 “저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용서합니다”라는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되풀이한다. 경찰의 조사 결과 그는 스물다섯살 M국 출신의 외국인 근로자로 근처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고향에 있는 가족과 전화를 하고 싶어 무료로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는 전원주택에 찾아오는 것이다. 시골에서 무료로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곳은 비밀번호가 설정되지 않은 이 집뿐이란다.

딱한 상황은 이해하지만 젊은 남자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친구의 조언에, 주인공은 경찰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설정한다.

며칠 후 그 청년은 방울토마토 봉지를 들고 찾아와 문 앞에서 간청한다. 문을 열어주지 않자 한국어를 더 잘하는 동료가 와서 사정을 이야기한다. 나쁜 사장을 만나 돈을 못 받았고, 3년째 고국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많이 아픈 부모님과 자주 통화하고 싶다고도 한다. 경계를 넘지 않겠다고, 제발 인터넷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주인공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주인공은 청년이 두고 간 과일 봉지를 들여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산을 쓴 채 밖으로 나간다. 밖엔 그 청년이 혼자 비를 맞고 서 있다. 주인공은 그를 집으로 들이려 하지만 그 청년은 “넘어가지 않습니다”라고 외치며 완강히 버틸 뿐이다.

사회적 시선이 관계에 인위적인 경계를 긋곤 한다. 뉴스에서 듣고 보는 험악한 사건·사고들이 우리 일상에 경계라는 높은 벽을 세워놓는다. 때로는 그 벽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적정한 선이 있어 좋은 관계가 유지되기도 한다. 그 선을 넘으면 나쁜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니 제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은 절대 넘지 말고, 불필요한 벽은 마음으로 넘어섰으면 좋겠다.

참, 초등학교 때 그 짝은 이제는 나의 아내가 됐다. 나는 선은 넘지 않고 벽은 허물었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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