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겨울 나들이

입력 : 2020-04-03 00:00 수정 : 2020-04-05 00:07

여행·관광·소풍·나들이.

이런 단어들이 우리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지난여름 한일관계 냉각으로 일본 여행을 포기한 이후 이제는 사전적 의미가 ‘집을 떠나 가까운 곳에 잠시 다녀오는 일’인 나들이마저 어려운 상황이 됐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늘 공기처럼 접하던 바깥에 대한 동경은 점점 커져만 간다. 여기저기 둘러보는 관광은 포기하는 게 당연하지만 낯선 곳에서 마음의 휴식이나 성찰을 얻고 오는 여행까지 못한다는 것은 그저 아쉽기만 하다.

박완서 작가의 1970년대 소설 <겨울 나들이>는 허탈감에 집을 나선 한 여자가 짧은 여행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북에 아내를 두고 딸 하나만을 데리고 온 화가와 결혼한 여자는 어느 날 남편이 그린 딸의 초상화를 본다. 여자는 남편이 북에 두고 온 아내를 못 잊고 있구나 싶어 배신감을 느낀 채 겨울 여행을 떠난다. 여자는 온천장에서 하룻밤 머물며 몸을 녹여보지만 허탈한 마음은 좀처럼 녹지 않는다. 여자는 호숫가를 찾는다. 얼어붙은 호수만큼 황량한 거리를 걷다가 여인숙에 든 여자는 연신 도리질을 해대는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주머니의 환대를 받고 스르르 낮잠이 든다. 단잠에서 깨자 여자에게 정갈한 밥상을 차려 준 아주머니는 인생 사연을 풀어놓는다.

전쟁 때 미처 피신을 못한 남편은 처가와 집을 오가며 숨어 지낸다. 아주머니는 거짓말을 못하는 시어머니에게 아이 가르치듯 무조건 모른다고 하셔야 한다고 다짐을 받아놓았지만 그래도 사뭇 불안하다.

어느 날 마당에서 “모른다”고 외치는 어머니의 큰소리가 들린다. 마침 숨어 있던 남편이 엉겁결에 뛰쳐나갔다가 음식을 구하려던 패잔병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 후로 어머니는 연신 도리질만 해댄다. 아주머니는 이제 치료는 포기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정성껏 모실 뿐이다. 여자가 여인숙을 떠나며 1000원을 쥐여주자 아주머니는 연신 고마워하며 이 돈을 노자 삼아 서울 나들이를 가겠단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하숙집에 며칠째 안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고 밤새 걱정하던 아주머니는 자신이 서울에 가면 아들이 무탈할 거라는 미신을 스스로 만든다. 그 ‘모성의 나들이’에 동행하며 여자는 자신의 인생도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짧은 겨울 나들이에 고마움을 느낀다.

사실 우리는 지난겨울부터 긴 나들이를 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집을 떠나 전염을 두려워하며 서로 경계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낯선 일상으로의 여행이다. 누군가에겐 아픈 나들이요, 공포의 나들이고,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걱정하는 나들이요, 가슴 쓸어내리는 나들이다. 이 나들이는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까? 물론 정부대로, 공동체대로, 개인대로, 저마다 다른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다만 깨달음 뒤에 찾아올 평범한 일상이라는 집이 이제는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길 바랄 뿐이다.

이 긴 나들이에서 만난 보건당국 관계자들, 의료진들, 그리고 시민의 품격을 보여준 국민에게 고맙다. 우리에게는 전우애가 생겼다. 이제 우리는 곧 겨울 나들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추천광고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