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나는, 나를 응원한다

입력 : 2020-03-06 00:00

16년 전 삼일절, 독도에서 생방송을 했었다. 방송은 잘 끝났지만, 독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궂은 날씨 때문에 타고 갔던 오징어잡이배가 우리를 데리러 올 수 없다고 했다. ‘내일이면 가겠지.’ ‘오늘도 못 가는구나.’ 기대와 포기의 나날을 열흘쯤 보냈을 때, 촬영 중 넘어지면서 오른쪽 귀밑 턱뼈가 부러졌다. 독도경비대 식량수송 함정을 타고 급히 육지의 병원으로 가 이에 못을 붙여 철사로 동여매는 턱 깁스를 했다.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두달, 무엇보다 아나운서로서 정확한 발음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전갱이의 맛>은 성대낭종 수술을 받아 일시적으로 말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여자는 우연히 이혼 3년 만에 전남편을 만난다. 남자는 자신이 변했다고 말하며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전갱이구이를 시켜놓고 2년 전 성대 수술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힘없는 작은 소리다. 음식이 나온 후 생선을 발라내고 손을 씻으라고 레몬을 갖다주는 모습만 봐도 그가 변했다는 걸 여자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목을 많이 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교수의 꿈을 접고 박사논문도 포기했단다. 말을 잃었던 시기에 꿈마저 접으면서 그가 얻은 게 무엇인지 궁금한 여자는 남자를 재촉했다. 강제 묵언수행을 하는 동안 그는 그를 제외한 세상 전부가 떠들어대는 혼돈의 공간에서 살았다고 했다. 고요한 동굴이 아니라.

목적지를 적은 쪽지를 받아든 택시기사의 표정도 싫었고, 손가락으로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식당 주인의 응대도 불편했다. 비 내리던 어느 날, 비가 온다는 혼잣말조차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무척 답답해 수화를 검색해 손짓으로라도 말을 했었단다. 어설픈 수화도 자신의 답답함을 해결하진 못했고, 결국 그에게 절실한 것은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자신의 말이었음을 깨달았단다.

그 뒤로 그는 자신만의 단어와 표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과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상대방도 더 배려하게 됐다. 그래서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를 만난 후 여자는 가끔 묵언수행에 들어간다. 그때마다 전갱이의 맛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만의 말 목록을 갖게 된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숱한 말들을 쏟아내지만, 거기에 정작 나를 위한 말은 없다. 그토록 타인의 위로를 갈망하는 우리는 왜 나 자신을 위로하지 못할까?

문득 턱에 깁스를 하고 어금니를 악문 채 입술을 움직여 애써 말하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말 한마디에 공들이고 힘주던 시절, 버거운 한마디에 큰 위안을 얻던 시절 말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싸움이 한창이다. 사람을 만나기도 어디를 가기도 부담스러운 요즘, 누군가의 말이 그립거든 그냥 나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던져보면 어떨까? 나를 가장 잘 아는 나 자신이 하는 말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말일지도 모른다. 지루하고 불안한 요즘, 나를 가장 잘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를 응원한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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