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추억은 늙지 않는다

입력 : 2020-01-31 00:00 수정 : 2020-02-02 00:11

여고 동창 6명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단발머리에 흰색 교복을 입던 고등학교 1학년12반 친구들이 처음 만난 지 45년 만에 떠난 여행이다. 각자 하는 일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다르지만 계절에 한번 정도 만나 우정을 지켜온 친구들이다. 이렇게 여행을 가게 된 것은 한 친구 덕분(?)이다.

1년 전 친구가 뇌수술을 받았다. 신앙심이 깊고 배려심도 탁월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수술 소식에 너무 놀라 병문안을 갔다.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환자복을 입은 친구는 너무나 평화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인경아. 그동안 딸·엄마·아내·며느리·언니·형수 등 역할에 충실하느라 정작 내 건강은 못 챙겼나 봐. 이젠 정말 나를 위해 살고 싶어. 나 건강해지면 여고 동창끼리 다시 한번 수학여행을 가자. 가서 정말 마음 편히 재미있게 놀자.”

친구의 건강이 회복됐고, 우리는 그동안 적립한 회비로 여행을 떠났다. 화장품이나 멋진 옷 대신에 약과 건강보조제, 날씨에 따라 덧입을 내복·스카프·카디건, 당 떨어지면 먹을 온갖 간식 등으로 가득한 가방을 들고서. 비록 주름살과 흰머리가 가득한 나이가 됐지만 우리는 여고생처럼 깔깔거리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친구들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여고 시절의 모습을 ‘증언’했다. 나는 수업시간에 수시로 졸고 실내화에 때가 묻으면 깨끗하게 빠는 대신 하얀 분필을 칠해 위장하고 수시로 매점에 가 빵을 사먹었단다. 나는 항상 책을 읽던 문학소녀에 나름 청순한 여고생으로 스스로를 기억하는데….

우리는 모두 여고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수다를 떨었고 지금까지 무사히 잘 살아온 것을 서로 축복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작 여행지에서 어디를 가고 뭘 먹는지는 신경도 안 썼다.

여행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서로를 배려해주는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3박4일의 일정 동안 걸음이 느린 친구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고, 화장품 가방을 놓고 온 친구에게 화장품을 나눠주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잘 경청했다.

만약 여고 시절로 돌아가면 무엇을 바꾸고 싶으냔 내 질문에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성공한 삶은 아니지만 지금 삶도 만족하고 감사하다”고 답했다.

그저 나이라는 숫자만 늘리며 늙은 것이 아니라 좋은 포도주나 된장처럼 잘 숙성된 친구들이 참 예뻐 보였다.

여고 동창들과의 여행을 통해 비록 몸은 늙지만 추억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팔순·구순이 돼서도 서로 만나면 추억 열차를 타고 다시 여고생의 마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수시로 음식을 흘리고 호텔방에 물건을 두고 오는 내게 친구들은 “넌 참 손이 많이 간다”고 했다. 그래서 어쩌면 나와 다시는 여행을 안 가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 친구들을 계속 만날 거다. 친구들 덕분에 잠시라도 동심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유인경 (방송인)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