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옥상에서 만나요

입력 : 2019-01-11 00:00


옥상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커피 한잔으로 업무의 피로를 달래는 공간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선배에게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듣는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내 연애의 짜릿함을 맛보는 공간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삶을 마감하는 생각을 한번쯤 떠올린 장소이기도 하다.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 <미생> 이후 드라마에서 옥상 장면이 유난히 눈에 많이 들어온다.

정세랑 작가의 단편소설 <옥상에서 만나요>는 직장에서 갑질과 성희롱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회사 언니들에게 비밀주술서를 물려받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최근에 하나둘 결혼을 하게 된 친한 언니들에게 비법을 물어보니 옥상에서 마법주문을 외우면 신랑감이 나타난단다. 속는 셈 치고 옥상에서 주문을 외운 주인공 옆에 실제로 누군가 나타난다. 그는 인간처럼 보이는,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그 무엇이었다. 비밀주술서에서 말한 대로 주인공은 무기력해 보이는 그를 남편으로 여기고 집에 들인다.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지만 그는 여전히 기운이 없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에게 목덜미를 물린 주인공은 이상하리만큼 개운한 느낌을 받는다. 무언가 빠져나간 것 같은 시원한 느낌이다.

그가 그녀에게서 빨아들인 것은 절망이었다. 그는 타인의 절망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다. 그날 이후 공무원 시험 오수생, 왕따에 시달리는 여중생, 기르던 돼지를 구제역 파동으로 생매장한 축산업자 등을 집으로 데려왔고, 남편은 그들의 절망을 남김없이 빨아먹는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남편에게 데려간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편에게 절망을 빼앗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선다. 어찌 보면 주인공을 절망에서 구해낸 사람은 다정하게 귀를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줬던 회사 언니들이었다.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오늘 뜨는 해는 한달 전에 뜨고 졌던 해와 다르지 않다. 나의 엄혹한 일상은 새해에도 그대로다. 여전히 절망이 있고, 답답한 상황이 있으며, 결코 풀지 못할 것 같은 엉킨 실타래가 있다. 크고 작은 절망은 누구나의 인생에 함께한다. 몇몇 사람들은 극적인 사건·사고를 겪으며 인생의 절벽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절망의 절반은 단순한 넋두리로도 가벼워질 수 있는 한줌 걱정거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절망들을 없애줄 누군가를 늘 찾아 헤맨다. 절망을 들고 집을 나서 조금은 더 커진 절망을 들고 돌아온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의 절망을 빨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잊고 산다. 내가 만나는 누군가가 아침에 들고나온 절망은, 단지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작아질 수 있다. 그는 무언가 사라진 것 같은 개운함을 느낄 것이다. 서로의 절망을 조금씩만 빨아들인다면 우리는 행복한 2019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내일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옥상에서 만나야겠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추천광고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