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물건들

입력 : 2018-12-07 00:00

저녁 무렵 우연히 시내에 있는 대형 잡화매장에 들렀다가 현대인의 소비문화를 목격했다. 수많은 젊은이와 청소년들이 천원·이천원짜리 물건들을 바구니에 주워 담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온 이들도, 혼자 온 이들도 가벼운 주머니에 맞는 소비로 그날의 피로를 씻어내는 듯했다. 그 물건들은 그들의 방으로 옮겨져 그들의 삶을 조금은 윤기 있게 만들 것이다.

김의경 작가의 단편집 <쇼룸>에 나오는 <물건들>은 대형 잡화매장을 통해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고, 소비의 노예가 되기도 하는 청춘의 단면을 보여준다. 개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찾았다가 매일 습관처럼 ‘다이소’에 들르게 된 ‘나’는 그곳에서 만난 ‘영완’과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동거에 들어간다. 그들은 천원의 소비로 자신들의 공간을 채워나가며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곧 자신들이 구입하는 물건가격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실감한 두 주인공은 더 높은 가격대로 올라가지 못하고 평생 그 수준에 머물 것 같은 좌절감에 서로에 대한 사랑마저 놓아버린다. 매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매장에서 헤어지고 두 사람의 공간은 다시 ‘나’ 한 사람의 공간이 된다. 소비가 능력과 지위의 표현이 되는 시대에 사는 청춘들은 자신의 공간을 물건들로 채워보려 하지만 그 물건들은 결코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도 공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네 아이를 키우며 돈 잘 버는 남편과 멋진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던 수전은 어느 순간 삶의 허망함을 느낀다. 결국 수전은 아이들을 가정보모에게 맡기고 집을 떠나 혼자만의 공간을 찾는다. 런던의 변두리 호텔 19호실에 매일 찾아가 한나절씩 혼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수전은 어떤 역할과 의미도 강요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그곳에서 자유를 느낀다. 아내의 수상한 행동을 의심한 남편이 아내가 매일 호텔에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되면서 수전의 일상은 다시 전환점을 맞이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강조했던 것처럼 도리스 레싱은 여성이 정체성과 독립성을 잃지 않으려면 온전히 본인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린 시절 그토록 갖고 싶었던 내 방이라는 공간은 청춘들에게는 꿈의 공간이자 현실의 공간이다. 결혼과 동시에 다시 방을 공유하게 된다고 보면 청춘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나만의 공간을 누리는 시기이다. 그 방은 내 능력을 상징하는 소비의 대상물로 채워져야 할까? 아니면 나의 정체성과 독립성으로 채워져야 할까?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늘 지나가는 시간을 아쉬워하고 기념한다. 하지만 내가 늘 머무는 공간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다. 지난 한해 내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했는지 돌아보며, 필요 없는 물건들은 보내고 내 정체성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는 의식을 가져보면 어떨까? 세상이 복잡할수록 내 공간은 단순했으면 좋겠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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