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연애의 기억

입력 : 2018-10-12 00:00

6학년 때 짝이랑 자주 다툰 기억이 있다. 책상에 금을 긋고 지우개가 넘어오면 내 거라고 우기던 시절이다. 둘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짝은 일기장을 꺼내 적었다. 내 일기장에는 짝의 불만을 알려주는 선생님의 메모가 적혀 있곤 했다. 나도 짝의 그런 행태에 대해 항의성 일기를 쓴 적도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일기장은 내 책꽂이에 있다. 그때 그 짝은 내 아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받은 줄리언 반스의 장편소설 <연애의 기억>은 폴의 50년 전 기억으로 시작한다. 열아홉살의 대학생 폴은 방학 동안 고향집 근처 테니스클럽에서 수전을 만난다. 당당하고 유쾌한 그녀와 파트너로 경기를 치른 폴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두 딸과 남편이 있는 여자로 스무살이 더 많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수전도 폴에게 사랑을 느끼고 두 사람은 함께 떠난다.

결혼 전에 나의 유학으로 떨어져 있게 된 나와 아내는 편지로 사랑을 나눴다. 이메일도 없고, 국제전화도 비쌌던 시절이다. 각자 쓴 일기 일주일분을 모아 편지로 보내면 열흘이 지나서야 받아볼 수 있었다. 가난한 남자친구를 위해 아내는 봉투에 매번 5달러 지폐를 넣는 불법을 저지르기도 했다. 지금도 그 편지들은 추억놀이에 사용된다.

<연애의 기억>에서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과 달리 현실은 냉혹했고, 애정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수전은 우울증에 빠지고 폴은 자신의 무능을 한탄한다. 이 이야기는 노인이 된 폴의 기억에 의존하여 그들의 희로애락을 풀어낸다. 이 작품의 원제목이 ‘유일한 이야기(The Only Story)’인 것을 보면 첫사랑의 기억은 나만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가끔 아내와 그 시절을 더듬다보면 기억이 엇갈린다. 같은 경험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그 당시 기억들은 고체 소통의 기억이었다. 서로 고체처럼 떨어져 있다보니 소통을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했던 시절이다. 집에 전화를 걸어 메모를 남겨달라고 하거나, 밤마다 이불에서 한시간씩 전화를 하고, 약속시간을 못 지키면 발을 동동 구르던 때다.

요즘 젊은 세대의 연애는 기체 소통을 넘어 양자역학의 소통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영상통화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옆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준다. 한 사람이 말하면 상대방이 바로 반응할 수 있고, 두 사람의 소통도 고스란히 기록되는 시대다. 기억을 맞춰보는 추억은 더이상 필요 없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연애만 존재한다.

분명히 소통의 여건은 좋아졌지만 오히려 소통의 밀도는 낮아졌다. 연애기간도 짧아지고, 젊은 부부의 이혼도 늘었으며 1인가구도 늘었다. 오해도 많아지고 이해와 공감도 줄었다면 과장일까? 혹시 소통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기억은 혼자만의 전유물이지만 연애나 소통은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하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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