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바쁘다. 망한다.

입력 : 2018-07-13 00:00

“아유, 그렇게 바쁘셔서 좋으시겠어요.”

정년퇴직한 후에도 강의, 방송 출연, 칼럼 쓰기 등 다양한 일을 하는 내게 이런 덕담을 하는 이들이 많다.

일정을 정리해둔 나의 수첩엔 주말까지 할 일이 있고, 어느 날은 하루에 3~4개의 일정이 있는 날도 있다. 나보다 훨씬 능력 있는 이들도 건강상의 이유나 다른 사연들로 일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진짜 바쁜 걸까. ‘바쁘다’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일이 많거나 또는 서둘러서 해야 할 일로 인해 딴 겨를이 없다’ ‘몹시 급하다’ ‘여유가 없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일이 많긴 하지만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도 아니다. 서둘러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도 드물다. 나는 어쩌면 바쁜 척하거나 바빠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진 것 같다.

강의나 방송프로그램 제안이 뜸하면 ‘이제 난 용도 폐기되는 걸까’란 불안감이 스멀스멀 솟아오르고, 지인들로부터 식사 제안을 받지 못하면 괜히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거나 잊히는 것 같아 서운함을 느낀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이나 약속이 많아지면 “아이고, 바빠죽겠네. 대체 난 언제나 느긋하게 살아보나”란 엄살을 떤다. 나란 인간은 이토록 모순투성이다.

바쁘다고 소문나다보니 내 삶은 풍요롭고 풍성한 것이 아니라 초라하고 쓸쓸해진다. 정말 바쁜 날은 끼니도 챙겨 먹지 못하거나 역이나 공항 등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꼬인 스케줄 때문에 마음만 급해 약속에 늦거나 물건을 흘리는 등의 실수를 한다. 과로하니 면역력이나 체력도 떨어져 요즘은 온갖 건강보조식품과 영양제를 챙겨 먹기 바쁘다.

친구들도 내 일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너 바쁜 것 같아서 우리끼리만 만났어”라고 자기들끼리 만나 즐겁게 밥 먹으며 미소 지은 사진만 보낸다. 어떤 사람은 전화를 걸어 “지금 통화 가능해요? 바쁜 데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닌가요?”라며 배려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한다. 좋은 사람들과 기회들을 잃어가는 것 같다.

며칠 전에 지방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근황을 묻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이젠 춤추듯이 살아요. ‘슬로우 슬로우 퀵퀵’ 스텝을 밟듯이 느긋하게 지내다 가끔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면 되죠”라는 조언을 해줬다.

한자로 ‘바쁠 망(忙)’ 자를 보면 ‘마음 심(心)’에 ‘망할 망(亡)’, 마음이 망했다는 뜻이다. 바쁘다는 것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망해가고 있다는 증거다. 괜히 바쁘게 살아야 성실하고 멋진 삶을 산다는 착각을 버리고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아야겠다. 종종걸음으로 헐떡거리며 살지 말고 춤추듯이, 황홀한 스텝을 밟듯이, ‘슬로우 슬로우 퀵퀵’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그 리듬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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