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에서] 한국인이 설을 두번 쇠는 까닭

입력 : 2020-01-24 00:00 수정 : 2020-01-27 23:50

설날은 새날이다. ‘새’는 훈차(訓借)하면 동(東)이고, 음차(音借)하면 설(薛)이다. 경상도 방언에서는 ‘새’를 ‘셰’라 하고, 중국어로는 설을 ‘쉐(xue)’라 발음하는데, 신라인은 설을 ‘셰’라 발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두(吏讀)로 서울을 동경(東京)이라 표기하였고, 신라 6촌 중 가장 동쪽 마을사람들은 성(姓)을 설이라 했다. 즉, 설날 또는 설은 새해의 첫날, 또는 그것을 기념한 명절을 가리킨다.

우리 조상들은 부여·삼한 시대부터 설을 쇤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국가들은 그때부터 중국 역법(曆法)을 받아들여 사용했다. 기원전 1600년 중국에서 상(商)을 건국한 탕(湯)왕 때 ‘음력’에 바탕을 둔 역법이 만들어졌고, 서기 443년 송(宋) 원가(元嘉) 20년에는 ‘원가력(元嘉曆)’이 만들어졌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와 마한(馬韓) 사람들이 ‘상나라 역법(商曆)’ 정월에 제사를 지낸 뒤 연일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는 서기 488년 신라 소지왕(炤知麻立干) 때 설을 쇘다는 기록이 있다. 역법이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인간사회에는 새해 첫날을 기리고 즐기는 풍습이 있음을 고려하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런데 설은 ‘새해의 시작’ 이상의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거의 빠짐없이 역법을 바꾸어 새 왕조가 천운을 따른 것임을 과시하였다. 즉,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새로운 날짜체계를 선포하고, 백성은 그 날짜에 맞춰 명절을 쇠도록 했다. 그것은 한반도의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말해, 설을 비롯한 명절은 왕권유지의 상징이라 해석할 수 있다.

19세기 한·일 양국에서는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2년 11월 양력을 도입했다. 조선은 친일 정권 김홍집 내각이 1895년 10월 단행한 을미개혁을 통해 양력을 도입했다. 중국 중심의 열국(列國)체계에서 탈피하여 서구 중심의 세계체계에 편입하고, 자국 국왕 중심의 체제를 정립하려 했다. 한·일 양국은 이듬해부터 새해 첫날을 양력 1월1일로 바꾸고, 각각 메이지(明治)와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선포했다.

일본인은 새로운 역법에 순응했지만, 조선 백성은 달랐다. 그들은 을미개혁을 일제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공식 일정은 모두 양력에 기초했기 때문에 백성은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명절·제삿날·생일 등 사적영역에서는 여전히 음력을 사용했다. 정부는 양력 1월1일을 새해 첫날로 정했지만, 백성은 음력 1월1일을 설로 고수했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식민지 조선사람들에게 양력뿐 아니라 그에 기초한 일본명절을 강요했다. 일제는 양력 1월1일을 ‘새롭고 진취적이다’라는 뜻의 신정(新正)이라 하고, 조선사람이 쇠는 설은 ‘오래되어 폐지되어야 한다’라는 의미로 구정(舊正)이라 불렀다. ‘구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공식 명칭이었으나, 1985년 ‘민속의 날’로 바뀌었다가, 1989년 비로소 ‘설날’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이것이 한국인이 이중과세(二重過歲), 즉 설을 두번 쇠는 역사적 연원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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