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63)웃음소리

입력 : 2021-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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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에 어두운 민심 속 잠행 나온 숙종

웃음소리에 이끌려 골목을 오르는데…

 

숙종은 땅거미가 내리면 허름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호위무사도 없이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여기저기 쏘다니며 백성들이 살아가는 걸 두눈으로 직접 보고 두귀로 직접 들었다. 주막에 들러 대포 한잔 마시고 짠지 한점으로 입을 다시며 임금 욕하는 소리도 귀담아들었다. 세상 민심이 흉흉했다. 설상가상 역병이 돌아 민심은 더더욱 어두웠다. 작년 농사가 가뭄과 홍수로 예년에 없던 흉년이라 백성들의 보릿고개 넘어가는 신음소리가 애간장을 끓게 했다. 이 골목 저 거리 발길 닿는 곳마다 한숨소리뿐이라 숙종의 마음이 천근만근인데 어디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저 소리 들어본 지 얼마만인가? 저 웃음소리!”

숙종은 깜깜한 부암동 골목길을 비틀거리며 넘어지며 웃음소리 따라서 허겁지겁 올랐다. 서너칸 초가집들이 띄엄띄엄 있는 골목 끝자락에 웃음이 흘러나오는 집안을 들여다봤더니 아무리 훑어봐도 웃음이 나올 이유가 없었다. 관솔불을 밝혀놓은 헛간에서 이집 주인인 듯한 남자는 짚신을 삼고 아이들은 짚을 다듬고 아이들 할아버지는 가위로 짚신을 다듬었다. 할머니는 관솔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안주인은 쟁반에 쑥떡을 담아왔다. 허허허 호호호 킬킬킬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숙종은 그 집 마당으로 들어가 ‘똑똑똑’ 헛간 문고리를 두드렸다. “이 야심한 밤에 누가 찾아왔나?” 헛간 문이 열렸다. “지나가던 과객이요, 목이 말라 염치 불구하고 들어왔습니다” 영감님이 숙종을 보더니 “누추하지만 이리 앉으시오” 하며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내어줬다. 숙종의 무릎이 흙투성인 걸 보고 말했다. “올라오는 골목길에 올봄 얼었던 흙이 녹아 계단이 허물어졌는데, 일손이 모자라 손쓸 틈이 없어 저 모양입니다. 넘어진 모양인데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요?” 숙종이 웃으며 “괜찮습니다” 하자 며느리가 물 한사발과 쑥떡 세개를 쟁반에 얹어왔다. 부암동 골목을 돌면서 배가 꺼진 숙종은 쑥떡을 정신없이 먹었다. 보릿가루 쑥떡이었다. 마지막 쑥떡을 먹다가 반쪽을 조끼 호주머니에 넣었다.

“온 나라가 한숨소리뿐인데 귀댁은 무슨 경사가 있어 집안에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소이까?” 짚신을 삼던 이집 가장이 소피를 보고 오다가 입을 열었다. “큰 경사는 없지만 큰 걱정거리도 없소이다” 숙종이 물었다. “짚신 팔아 호구지책으로 삼으니 궁핍이 쌓인 게 소인 눈에도 보이는데 걱정이 없다니요?” “지난 세번 장날마다 비가 와서 짚신을 못 팔아 저렇게 쌓여 있습니다만 비가 그치면 또 팔러 나갈 겁니다” 그는 물 한사발을 마시고 또다시 짚신을 삼으며 말했다. “짚신 못 파는 게 문제겠어요 어디, 비가 와야지요. 농사꾼들이 학수고대하는 단비잖아요” “마음 씀씀이가 부자이십니다. 허허” 숙종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나는 진짜 부자예요. 빚 갚으며 저축하며 살아가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짚을 다듬던 아이들이 까닥까닥 조는 걸 보고 숙종이 일어섰다.

밤이슬을 맞으며 궁궐로 돌아온 숙종이 주방 상궁을 불렀다. 잠자던 주방 상궁이 놀라서 어전에 꿇어앉자 조끼 주머니에서 꼬들꼬들 말라붙은 보릿가루 쑥떡을 꺼내 말했다. “당장 이 떡을 만들어 올리렷다.” 주방 상궁이 “전하 이 보릿가루 쑥떡은 드시지 못합니다” 하자 임금이 노해 말했다. “먹고 안 먹고는 짐이 정할 일이로다.” 주방 상궁은 부랴부랴 보리쌀을 구해와 절구에 빻고 주방 궁녀들은 자다가 일어나 초롱불을 들고 궁궐을 돌며 쑥을 뜯어 보릿가루와 섞어 찐 후 절구질을 했다. 그 사이 숙종은 안주를 곁들여 약주를 했다. 주방 상궁이 보리쑥떡을 해왔을 때는 닭이 울었다. 보리쑥떡을 한입 먹어보고는 상을 물렸다. 숙종은 잠이 오지 않았다. “빚 갚으며 저축하며…” 그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이튿날 아침, 한 떼거리 일꾼들이 소달구지에 돌을 싣고 와 부암동 짚신장수 집으로 오르는 골목길에 돌계단을 놓았다. 밤이 되자 어젯밤에 왔던 그 허름한 나그네가 다시 나타났다. 짚신장수가 일손을 놓고 벌떡 일어나 숙종의 두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젯밤 귀인께서 다녀가신 후 오늘 아침 골목길이 저렇게 변했습니다요.” 숙종이 허허 웃으며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요.” 시침을 뚝 뗐다. “어젯밤에 궁금해서 잠을 못 잤습니다요” 짚신장수가 “뭐가 그리 궁금했습니까요?” 묻자 숙종이 답했다. “빚 갚으며 저축하고 산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밤새도록 생각했지요.” 컬컬컬∼ 짚신장수가 목을 젖히며 웃더니 말했다. “제 부모님이 저를 낳으시고 키워주셨으니 제가 빚을 졌잖아요. 정성껏 봉양하니 빚을 갚는 것이고, 제가 또 자식을 낳아 잘 키우고 있으니 저축을 하는 거잖아요.” 숙종이 크게 웃었다. “여봐라∼ 상을 올려라” 숙종이 소리치자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주방 상궁이 지게에 바리바리 지고 온 평복 차림 군졸들의 지게에서 고리짝을 내려놓았다. 갈비찜에, 약밥에, 영덕대게에, 수정과 한독, 그리고 돈 천냥. 짚신장수 일가족은 끝까지 임금인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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