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50)친구

입력 : 2021-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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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설, 삼대독자 유 진사와 혼례

몇년 만에 얻은 아들의 친부는…

 

저녁나절 허 대인이 서당에 찾아왔다. 개다리소반에 조촐한 술상을 마주하고 허 대인과 훈장님이 마주 앉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오갔지만 훈장님은 허 대인이 서당을 찾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서당엔 남학동이 열다섯명이요 여학동이 셋인데 여학동 중 하나가 허 대인의 셋째 딸 허설이다. 혼기가 찬 열일곱살로 신랑감 두사람을 저울질하고 있는데 그 두사람도 이 서당의 학동이다. 유 진사와 강 초시.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은 출중한 신랑감이다.

유 진사는 천석꾼 집안의 삼대독자요, 강 초시는 깎은 밤처럼 반듯한 옥골에 허우대가 훤칠했다. 열여덟살 동갑내기인 둘 다 공부도 잘해 소과에는 단번에 붙어 유 초시, 강 초시로 불리다가 삼대독자 유 초시는 집을 지켜야 했기에 대과를 포기하고 진사가 됐지만 강 초시는 삼형제 중 막내라 공부를 계속했다. 허 대인이 서당을 찾아온 속내는 둘 중 하나를 허설의 신랑감으로 훈장님이 찍어달라는 것이다. 속 깊은 훈장님은 경솔한 짓을 할 턱이 없어 계속 웃기만 했다.

일이 복잡하게 얽혀갔다. 유 진사도, 강 초시도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둘 다 허설을 좋아해 서로 자신이 선택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당사자 허설은 강 초시를 흠모하고 있는데 칼자루를 쥐고 있는 허 대인은 유 진사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유 진사와 강 초시는 삼각관계에 있는 연적인데도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일은 간단하게 끝났다. 허 대인이 유 진사를 낙점했다. 강 초시는 실망했지만 유 진사와의 우정에는 실금도 가지 않았다. 허설은 서운했지만 유 진사를 싫어한 것이 아니어서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고을이 떠들썩하게 혼례식이 치러졌다.

새 신부 허설이 큰 짐을 지게 됐다. 삼대독자 유씨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는데 이게 어디 허설이 해결할 문제인가. 삼신할미의 몫이지.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새며느리 얼굴만 쳐다봤다. 일년이 가도, 이년이 가도 허설의 배는 불러오지 않았다. 시집의 눈총 받지 말고 맘 편히 지내라고 시어머니가 새며느리를 강 건너 친정으로 보냈다.

유 진사는 뜻하지 않게 처가살이를 하게 됐다. 친정집 별채에 살림을 차려 중문을 잠가버리면 본채와 다른 집이 되어 세간을 난 것 같은 기분이다. 강 초시가 가끔 놀러오면 허설은 심란한 마음을 감추고 술상을 차려 올렸다. 친정어머니는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내려와서도 새벽마다 우물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삼신할미께 빌었다. 허설이 스물둘 생일을 맞아 동네 친구들이 한방 가득 모였다. 시집에서 감주와 떡을 보내왔다. 친구들도 먹거리를 싸 왔는데 한 친구는 진달래술을 들고 왔다. 입에 착 달라붙는 달콤한 맛에 모두가 취했다. 별채 사랑방에서는 유 진사와 강 초시가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서너달이 지났다. 허설이 헛구역질을 하고 배가 불러오더니 시월상달에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유 진사네 집안에 웃음이 끊어질 날이 없었다. 경사 후에 흉사가 따라왔다. 원래 약골인 유 진사가 몇달을 두고 술을 퍼마시더니 병이 났다. 사람들은 아들을 낳고 너무 좋아 술을 마시다가 술병이 났다고 웃음 지었다. 겨울이 가고 삼라만상이 깨어나는 봄이 와도 유 진사는 일어나기는커녕 병세가 더더욱 깊어갔다. 삼년을 버티다가 젊은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다.

네살 난 상주가 상복을 입고 빈소에 서 있다가 쓰러져 자는 모습을 보고 문상객들도 가슴이 미어졌다. 고인의 둘도 없는 친구 강 초시가 호상차지(護喪次知·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가 돼 장사를 치렀다. 그나마 후사를 챙겨놓고 떠났으니 다행이다. 삼년이란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탈상 때 일곱살이 된 상주는 초상 때와는 달리 반듯하게 절도 하고 술잔도 올리고 곡도 했다. 상복을 태우는 불꽃이 춤을 추며 하늘 높이 올랐다.

계속 대과에 떨어진 강 초시가 문중 제사(第舍)에서 칡넝쿨로 머리를 동여매고 공부를 하다보니 삼경이 되었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강 초시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허설이었다. 말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만 하던 허설이 “둘이서 한평생 편히 살 수 있는 재물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강 초시는 단호히 거절했다. “부인, 그럴 수 없습니다.” 또다시 울던 허설이 “칠년 전 제 생일날 밤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제가 진달래술에 취해 정신없이 잠에 빠진 줄 알았겠지만 저는 멀쩡했습니다.”

허설은 한숨을 쉬더니 하던 말을 이어갔다. “안방으로 들어와 방사를 치른 이는 제 남편 유 진사가 아니고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강 초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 아닙니다, 부인.” 허설이 “유 진사가 시켰지요? 유 진사는 씨 없는 수박이라는 걸 자신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부인이 오해를 하고 있군요.” 강 초시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이었다. 새벽닭이 울자 어둠 속으로 사라진 강 초시는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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