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44)엮인 혼인 줄

입력 : 2020-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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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과거급제 매달린 우 진사 아들

당산목 앞에서 한 노파 만나는데…

 

초당에 처박혀 공부만 하던 노총각이 모처럼 강원 영월장터에 나왔다. 필방에 들러 지필묵을 사 들고 주막에 들어가 술 한잔 하고 나니 제 신세가 처량해졌다. 스물네해 살아온 세월이 오로지 한길, 아버지의 한이 맺힌 급제, 공부·공부·공부뿐이었다.

아버지 우 진사는 어릴 적부터 수재 소리를 들으며 쉽게 소과에 붙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칠전팔기를 굳게 믿고 여덟번이나 도전했지만, 또 낙방하고선 낙향하다가 동네 뒷산에서 목을 맸다.

일곱살 아들이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겠다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책을 펼쳤다. 결기가 느슨해질라치면 그 어미가 “뒷산 소나무 밑에 다녀오너라∼”라고 고함쳤다.

아들은 뒷산으로 올라가 그 소나무 밑에서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는 두루마기 옷고름을 쳐다보며 몸서리를 쳤다. 어머니는 남편이 목을 맸던 소나무에서 두루마기 옷고름을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뒀다.

우 진사의 아들은 열다섯살에 소과에 합격해 초시가 됐지만, 어머니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손자도 보고 싶지 않다며 우 초시가 노총각이 돼도 오직 살부지수인 과거 급제만 닦달했다.

동짓달 짧은 해가 떨어지고 어둠살이 내려앉았다. 막걸리를 세 호리병이나 마시고 상념에 젖어 지난 세월을 헤매던 우 초시가 주막집을 나와 비틀거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산허리를 돌아 내려오는데 개울가 당산목 앞에서 오싹 소름이 끼쳐 걸음을 멈췄다.

하얀 소복을 입은 노파가 쪼글쪼글한 얼굴에 새빨간 입술로 한쪽 팔을 가축통에 기댄 채 비스듬히 앉아 “홋홋홋호∼” 자지러지게 웃으니, 우 초시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우 초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노파에게 다가갔다.

“뉘신데 밤길 과객을 놀라게 하시오?”

“홋홋홋호호∼”

또다시 그 기분 나쁜 웃음을 날리더니 노파가 말했다. “나…, 엮인 혼인 줄을 봐주는 할미야.”

우 초시 취기가 확 날아갔다.

“홋홋홋호∼ 여기 괭이통 한번 들여다봐.”

괭이통에 뚫린 구멍으로 눈을 댄 우 초시가 깜짝 놀랐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꾀죄죄한 여식을 업은 애꾸 어미가 보였다.

“이 애꾸 여인이 내 색시가 될 사람이란 말이오?!”

우 초시가 버럭 역정을 내자 “홋홋홋호∼” 노파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답했다.

“업혀 있는 여식이 네 색시 될 사람이야, 13년 후에!”

“에라, 이 사기꾼 할망구야!”

우 초시가 뚜껑이 열린 괭이통을 빼앗아 개울에 던졌다. 그러자 노파는 “네놈한테 변고가 있을지어다”라고 앙칼지게 한마디 쏘아붙이고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 초시가 멍하니 서 있는데 하인들이 횃불을 들고 그를 찾아 나왔다. 이럴 수가! 어머니가 저녁식사를 잘하고 갑자기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상주 우 초시는 상중에 문상객이 끊긴 늦은 밤, 집사와 머리를 맞댔다. 마침내 결행의 날이 왔다. 어둠이 내리자 단검을 품속에 감추고 저잣거리로 나간 집사가 필방 뒤 살림집으로 스며들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아기를 업고 설거지하는 애꾸 뒤로 다가가 포대기를 푹 덮어쓴 채 잠든 여식을 향해 단검을 꽂았다. 거사를 치르고 나서 날렵한 집사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튿날, 집사는 의원을 염탐했다. 지난밤 모녀가 의원에 실려 왔다. 웬 미친놈이 부엌에 들어와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어미 등에 업혀 있던 여식은 뺨에 자상을 입었고, 어미는 어깻죽지에 칼이 꽂혔다는 것이다.

집사는 제 갈 길을 가고, 우 초시는 집과 논밭을 정리해 고향을 등졌다.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죄책감, 필방의 어린 딸 살인미수에 대한 죄의식으로 술독에 빠지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우 초시는 삭발한 뒤 절에도 들어갔다가 심마니도 됐다가 동네 서당 훈장도 지냈다가, 배를 타고 어부도 됐다가 엿장수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우 초시의 마음도 진정돼갔다.

우 초시는 장사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곰소 포구에 똬리를 틀고 염전을 입도선매해 큰돈을 모아 거상이 됐다. 널찍한 객주를 세워 팔도 거상들을 모았다. 부를 이뤘지만 허전했다.

전북 부안 원님의 외손녀와 혼담이 오갔다. 혼사는 일사천리로 이뤄져 꽃 피는 춘삼월에 혼례식을 올렸다. 우 초시 나이 서른일곱, 새신부는 방년 열여섯. 첫날밤 족두리를 벗기던 우 초시가 신부의 뺨에 난 자상을 보고 물었다.

“세살 적 영월에 살 때, 유모 등에 업혀서 자고 있는데 웬 자객이 칼을 휘둘러….”

“그만, 그만….”

우 초시는 신부를 안고 오열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년 하고도 오년 전, 한양에서는 피를 튀기는 사화에 정 대감 일가가 풍비박산이 났었다. 젖먹이 손녀가 애꾸눈 유모의 기지로 살아나 외할아버지와 셋이서 도성을 빠져나와 영월에서 필방을 하며 숨어 살았던 것이다. 십여년 만에 정권이 바뀌는 환국으로 외할아버지는 부안 원님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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