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주유천하 (143)전남 보성의 정해룡 고택(상)

입력 : 2019-12-02 00:00 수정 : 2019-12-02 23:48

호남 명문가로 항일운동하다 좌익의 길 걸으며 가문 몰락

집터는 ‘영구하해’라는 명당 거북이 바다로 들어가는 터로

좌청룡·우백호가 감싸 안아 호수 같은 바다도 보여 낭만적



전라도의 명문가들을 살펴보면 좌익을 많이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왜 돈도 있는 명문가에서 좌익을 많이 했는가. 그 이유는 일본 유학에 있다. 일제강점기 전라도 명문가들은 논밭이 많은 지주계층이었고, 돈이 있으니까 자식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는 게 하나의 트렌드였다. 이북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고 선교사를 연줄로 해서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이래로 집안도 좋고 돈도 있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상류층은 영국 유학을 갔다.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온 장택상·윤보선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영호남의 지주계층은 일본에 많이 갔다. 일본 유학을 갔다온 상당수는 조선에 돌아와서 고위 벼슬을 하는 출셋길을 걸었다. 하지만 일부는 항일운동을 하게 된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좌익의 길을 걷게 된다. 좌익을 한 집안은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 집안의 내력과 역사도 아울러 묻혀버리게 되는 비극을 겪었다. 전남 보성에 있는 정해룡 고택(가문)이 호남 명문가로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좌익을 했고, 이후로 그 역사가 묻혀버린 대표적인 집안 중의 하나다.

필자가 명문가를 볼 때 먼저 보는 점이 그 집터의 풍수다.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의 봉서동(鳳棲洞)에 정해룡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터는 영구하해(靈龜下海)라고 불리는 집터다. 도선국사가 전국의 명당 터를 기록해놓았다고 하는 <도선비결(道詵秘訣)>에 등장하는 자리다. 말하자면 명당 족보에 나오는 터다. 일찍부터 명당 신봉자들이 찾아 헤매던 자리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집터는 아무나 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신분이 있는 양반계층이 들어와 살 수 있는 터였다.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바다로 들어가는 터’인 것이다. 응봉산에서 그 맥이 4~5㎞ 내려와 끄트머리에 자리를 하나 만든 터가 바로 이 집터다.

집터 뒤로 거북이 등에 해당하는 봉우리가 둥그렇게 있고, 거북이 주둥이 바로 밑에 집터를 잡았다. 그래서 이 집을 ‘거북정(亭)’이라고 동네에서는 부른다. 또한 좌청룡과 우백호가 두겹으로 집터를 감싸 안았다. 두겹으로 싸면 한겹보다 더 좋은 것이다.

바둑으로 치면 두터운 기풍(碁風)과 비슷하다. 바둑 명인 임해봉의 기풍을 ‘이중허리’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우백호 쪽이 더 길게 내려와 집의 안산(案山) 역할도 한다. 집터의 앞이 너무 툭 터져 있으면 기운이 새어나간다. 앞산이 적당하게 가로막고 있어야 기운이 뭉친다. 앞산이 너무 높으면 집터를 눌러서 좋지 않다. 적당한 높이의 산이 앞에 있어야 좋다.

정면을 바라보면 약간 왼쪽으로는 바다가 보인다. 득량만이, 파란 바닷물이 보인다. 득량만은 바다지만 만(灣)에 들어와 있어서 호수처럼 보이는 바다다. 집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 이 득량만 바다가 보이니까 아주 넉넉한 마음과 낭만적인 시상(詩想)을 불러일으킨다.

집 앞에 온통 터진 바다가 보이면 너무 휑해서 오래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그러나 한쪽으로 40도 각도 정도만 바다가 보이면 살짝 엿보는 느낌이 있어서 바다가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뭣이든 간에 도 닦는 수행터가 아니고 민간인 주택이라면 반음반양(半陰半陽)이 좋다. 바다도 반절만 보이고 산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반음반양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이 집에는 오른쪽의 사당 앞에도 오래된 동백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직경 1m가 넘는 수령 500년 된 나무다. 동백은 빨리 자라지 않는 나무다. 동백이 집안의 사당 앞에 있는 것은 처음 봤다. 남쪽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향취의 수종이다. 오른쪽 담벼락에는 백백일홍(白百日紅)이 있다. 백일홍인데 하얀색의 꽃이 핀다. 이 집에서 백백일홍을 처음 봤다. 집 뒤로는 대밭도 있고, 대밭에도 역시 두그루의 오래된 동백이 겸손하게 서 있다.

이 집의 대지는 총 9917㎡(3000평)다. 3000평이면 장원에 가깝다. 400년 전에 이 집을 처음 지을 때부터 집안으로 계곡물을 500m 정도 끌고와서 좔좔좔 흐르는 물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식수도 되고 빨래를 하기에도 편리하다. 마당 한쪽에는 한반도 모양의 연못이 조성돼 있다. 1930년대에 정해룡이 조성한 것이다. 이 집을 통과한 계곡물은 다시 대문 앞을 통해서 동네로 내려가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이 명당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장원은 비극을 겪는다. 6·25 이후 6촌 이내의 8명이 총살과 교수형을 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조용헌은…

▲강호동양학자, 불교학자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 ▲저서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휴휴명당>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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