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의 경제이야기 (54)돈이라는 신뢰시스템

입력 : 2019-06-12 00:00 수정 : 2019-06-12 23:41

화폐, 신뢰의 크기 따라 진화

보리·금·은처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물품화폐서

지폐처럼 정부가 가치 보증하는 법정화폐로 점차 발전해와

 

오늘날 우리의 삶은 돈을 빼고는 성립되기 힘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기도 하다.

왜 우리는 옛날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간 종이 몇장을 받자고 하루종일 택시를 운전하고, 햄버거를 뒤집고, 보험을 파는 것일까. 앞으로 몇차례에 걸쳐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돈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면 돈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된다. 내가 충치가 생겨 치과의사에게 간다고 하자. 만약 돈이 없다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치과의사가 필요로 하는 무엇인가를 대가로 주는 길밖에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경제학 강의밖에 없다면 치과의사가 경제학 공부를 원하는 경우에만 내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돈이 없는 물물교환 경제에서는 이처럼 거래의 쌍방이 서로 원하는 제품을 갖고 싶어하는 기막힌 우연이 아니고서는 필요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돈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다. 치과의사는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상관하지 않고 돈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도 그 돈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치과의사는 내게 받은 돈으로 간호사에게 월급을 준다. 간호사는 월급으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다. 이렇게 돈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생산과 거래를 원활하게 해준다. 이에 따라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만 열심히 하며 살 수 있다. 돈이 없었다면 경제학 교수도 치의학을 공부해야만 했을 것이다.

결국 돈을 뒷받침하는 것은 상호신뢰이다. 내가 지폐를 신뢰하는 것은 이웃들도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돈을 “인간이 고안한 것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신뢰시스템”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폐의 역사는 신뢰의 크기에 따라 진화해왔다. 과거의 화폐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예를 들어 보리나 금·은 같은 것이었다. 이런 것을 물품화폐라고 한다. 물품화폐의 또 다른 예로 담배가 있다. 포로수용소나 교도소 같은 곳에서 죄수들은 담배를 돈 대신 사용해 재화나 서비스를 사고판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돈이 교환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돈 자체에 가치가 있을 필요가 있을까. 정부가 돈의 가치를 보증해준다면, 그래서 우리 모두가 돈이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종잇조각인들 돈이 안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폐가 나왔다. 지폐처럼 그 자체로 가치가 없는 화폐를 법정화폐 혹은 줄여서 법화(法貨)라고 한다. 정부의 명령에 따라 통용되는 화폐다.

미국 달러 지폐에는 ‘이 지폐는 모든 민간과 정부의 채무 결제에 사용될 수 있는 법화다’라고 인쇄돼 있다. 우리나라 지폐에는 ‘한국은행 총재’라고 쓰여 있다. 한국은행 총재가 이 지폐를 법화로 보증한다는 의미다.

미국 초기의 지폐는 단순한 종잇조각만은 아니었다. 정부가 금화나 은화로 교환해줄 것을 약속했다.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지만, 요구할 경우 언제든지 가치가 있는 물품으로 교환해준다는 약속에 의해 가치가 보장됐던 것이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달러와 금의 연계를 폐지하고서야 달러가 진정한 의미의 법정화폐가 됐다. 당시 화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고 “이것은 서양문명의 종말”이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몇년 뒤 달러와 금의 연계가 다시 회복됐다가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다시 폐지됐다.

돈이라는 신뢰시스템은 국경과 인종· 종교의 장벽도 뛰어넘는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서로 다른 신을 섬겼지만 금과 은, 금화와 은화를 신뢰한다는 점은 같았다.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둘이지만 돈에 대한 믿음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현자들은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기도 하다.

“돈은 언어나 국법·문화코드·종교·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인종·연령·성적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시스템이다.”
 



이지훈은…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한양대 경제학 박사 ▲현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 ▲저서 <혼창통> <단(單)> <현대카드 이야기>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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