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진짜 버려야 할 것

입력 : 2019-03-15 00:00


겨울옷을 정리하려다가 갖고 있는 옷을 모두 꺼내봤다.

직장생활을 30여년 하며 모은 정장들, 지인들에게 선물받은 옷, 최근 중독된 홈쇼핑에서 충동구매한 각종 옷, 울적할 때마다 시장에서 산 옷, 아직 버리지 못한 친정엄마의 유품 같은 옷, 딸 아이가 두고 간 옷 등 생각보다 엄청난 분량의 옷이 곳곳에서 나왔다.

‘정리의 여왕’으로 불리는 일본의 수납 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란 말에 감동을 받아 작정하고 버릴 옷을 골랐다. “설레지 않는 걸 다 버리면 이 집에 무사할 게 별로 없을 텐데”라고 혼자 구시렁거리며 남편을 흘긋 봤으나 난청인지 못 들은 듯했다.

살이 쪄서 더이상 입기 어려운 옷(혹시나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입을 수 있을 거라며 20년째 걸어둔 옷이다)을 포함해 목 부분이 늘어진 스웨터, 낡은 코트, 빛바랜 재킷 등을 마구마구 버렸다.

설레진 않지만 버릴 것인지 고민한 옷들도 있었다. 추억이 담긴 옷, 의미가 있는 옷들 말이다.

신혼여행 때 입은 장미무늬 원피스, 딸이 파리유학 중 사준 재킷 등을 비롯해 엄마의 옷도 단순한 옷이 아니어서다. 돌아가신 후 대부분의 옷을 정리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평소 아끼던 옷, 혹은 고급스러운 옷은 몇벌 남겨뒀다. 20~30년 전 옷이고 나와 체형이 전혀 달라 입을 수도 없는데 그 옷들을 버릴 수 없었다. 마치 엄마에 대한 내 추억이나 사랑을 버리는 것 같아서다.

그러다 생각해봤다. ‘의미’가 무엇일까. 엄마가 내게 남겨주신 것은 수많은 추억과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랑인데 그 옷들을 남겨두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일일까. 내 책상에 엄마 사진이 있을뿐더러 엄마와의 추억은 빛바래지 않는데 꼭 그 옷으로 엄마를 기억해야 할까. 의미란 내가 만든 허상일 뿐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쓴 일기장과 직장생활을 하며 매일 일정을 적은 다이어리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엽서도 다 모아뒀다. 하지만 더 나이가 들면 다 태워버릴 생각이다. 나중에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행복은 경험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란 말이 있다. 딸에겐 더 많은 나와의 즐거운 기억을 남겨주고 싶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임종하던 해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시집을 냈다. 그 시집에 수록된 ‘옛날의 그 집’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옷을 버리며 더 많은 것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질없는 욕망도 버리고 쓸데없는 걱정도 버리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도 버리고 싶다.

대신 매일 순간을 기쁨으로 물들여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다.

유인경 (방송인)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추천광고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