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치마 위로 떨어진 춘정의 꽃잎

입력 : 2019-03-15 00:00 수정 : 2019-03-18 14:27

여덟점 ‘빈풍도첩’ 중 하나로 여인의 곱살한 일거리 담아

햇볕 따스한 완연한 봄 춘정은 물이 오르지만

아가씨 마음은 한편 쓰라려 시집가기 전 부모 걱정에…
 


봄이 오면 봄그림이 보고프다. 조선의 문인화가 이방운이 봄바람을 앞세워 그린 그림에 곱다시 눈맛이 당긴다. 이 작품은 <빈풍도첩( 風圖帖)>이란 제목으로 묶인 여덟점짜리 화첩 중 하나다. ‘빈’은 중국 산시성 서북에 있는 주나라의 발상지이고, ‘풍’은 ‘풍속’의 줄임말이다.

이방운의 ‘빈풍도첩(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5.6×20.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경>에 빈지역의 풍속을 노래한 ‘빈풍’ 장이 따로 있다. 농촌의 고된 일상을 왕에게 들려주기 위해 지은 노래들이 그 속에 넘치는데, 이 그림은 여인의 곱살한 일거리가 소재다.

가만 들여다보니, 산과 물과 풋나무가 올망졸망해서 오갈 데 없이 시골이다. 바야흐로 화창한 한낮, 새들의 지저귐과 시냇물의 조잘거림이 화면 밖으로 굴러 나온다. 보는 이의 마음도 꽃무늬로 어룽질 참이다. 봄은 숨 가쁜 기쁨이다. 땅 위의 길짐승은 기지개를 켜고 하늘의 날짐승은 활개를 친다. 삼동을 견딘 목숨붙이들이 제 가끔 생명의 복원력을 보여주듯이 지천으로 널린 풀들은 연둣빛 얼굴로 살아 있는 열락을 소란스레 뽐낸다.

화가 이방운은 완연한 봄을 여인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펼친다. 햇발 좋은 언덕에서 생명의 요동질이 바빠지면 여인의 춘정은 물이 오른다. 나들이 나선 여인의 설레는 마음바닥은 그림 속에 적힌 노랫가락에서 슬며시 엿보인다. 주제와 관련이 있는 대목만 뽑아서 풀이해보자. ‘봄날은 햇볕 따스하고, 들리느니 꾀꼬리 소리로다. 아가씨는 광주리를 끼고 좁은 길 따라가며 부드러운 뽕잎을 따기에 바쁘네. 봄날은 해가 길어 하얀 쑥을 뜯기에 좋구나. 아가씨의 마음은 한편 쓰라려라. 공자에게 곧 시집가기 때문이라네.’

속뜻은 잠시 미뤄두고, 그림 오른쪽 아래로 눈길을 돌려보자. 두 여인이 갓 올라온 뽕잎을 따느라 바쁘다. 뒤편의 여인은 부지런히 쑥을 뜯는다. 그들이 걸친 분홍빛 저고리가 꽃물 들인 듯 어여쁘다. 좁다란 길을 따라 걷는 여인도 보인다. 광주리를 들고 봄나물을 캐다 그예 알았다는 듯이 버드나무에 날아든 새로 눈을 돌린다. 시냇가 철쭉은 싱숭생숭 봄빛깔로 피어나는데, 버들가지는 욜랑욜랑 봄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궁금하다. 저 안온한 풍정 가운데 노니는 여인이 왜 마음이 쓰라리다고 했는가. 봄이 왔으니 귀공자 품에 안길 날이 머지않을 게다. 부모 곁을 떠나 새살림 꾸밀 꿈을 떠올리면 한편 부끄럽고 한편 설렘이 인다.

그 옛날 시집가는 처녀는 모름지기 부모의 노후를 걱정한다. 하여 혼례가 다가온 여식은 남몰래 눈물 치레한다. 춘색이 화사하다 해서 마냥 춘정에 들뜰 수는 없는 여인의 결곡한 마음씨다.

옛적 여인의 촉촉한 행복이 봄날의 정서에서 움튼다. 마침 이 그림을 본 듯 유사한 심경을 읊은 시가 있다. 경북 안동 사대부 집안의 몸종이었던 설죽이 지었다.

‘푸른 나무에 노란 앵무새 우짖고 / 청루에 자줏빛 제비가 분주해요 / 향기로운 바람은 숲에서 흔들리고 / 꽃잎은 비단 치마로 떨어지네요’

행복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행복이 사무친다. 지금 여기 봄날의 무릎에 날아든 춘정이다.
 



손철주는…

▲미술평론가 ▲저서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흥, 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사람 보는 눈> <꽃 피는 삶에 홀리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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