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으로 보는 세상] 첫눈 속에서

입력 : 2019-02-11 00:00


바다 가까운 남녘 강마을에 첫눈이 온다. 이번 겨울 첫눈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다행이다.

눈이 내리면 내 마음은 뛴다. 눈송이를 맞으며 걷는 동안 마음 안에 하얀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손을 내밀고 천천히 걷고 있으면 손바닥에 눈이 떨어진다. 따뜻하게 녹는다. 눈이 녹은 물이니 눈물이다. 눈물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인간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운다. 둘 모두 눈물이지만 성격은 다르다. 기쁠 때 우는 눈물은 따뜻하고 화사하다. 눈물을 흘리는데 얼굴은 웃는다.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 삶이다.


나는 슬플 때 우는 눈물을 더 좋아한다. 아픔·고독·절망·패배의 냄새가 스며 있다. 슬플 때 우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느낀다. 온몸으로 흔들리는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것이다. 순간 인간은 반성하고, 참회하고, 기쁨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연민을 느낀다.

첫눈이 올 때 생각한다. 하늘에 무슨 슬픈 일이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순결하고 아름다운 눈을 지상에 뿌리는 거라고. 마음 아픈 일이 인간 세상에만 있을 것인가. 신들이 사는 세상에도 마음 아프고 어리석은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거라 생각하면 인간인 나는 마음이 좀 편해진다. 그래, 당신들도 엉망진창이군. 우리는 서로 닮았어.

강변에는 다섯그루의 멀구슬나무가 있다. 이 나무의 영혼을 사랑한다. 5월이면 나무에 연보라색 꽃이 핀다. 꽃향기가 은은하다. 이상한 점은 이 나무에 새들이 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꽃도 예쁘고 향기도 좋은데 왜 앉지 않은 거야?”라고 곁의 버드나무 가지에 앉은 새들에게 물어보지만 반응은 없다. 꽃이 지면 콩알만 한 초록색 열매가 열린다. 야외수업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열매를 따 던지며 논다. 가을이 되면 열매는 노란색으로 익는다. 식감이 푸석하고 맛이 없다. 새들은 여전히 날아오지 않는다. 겨울이 되어 온 세상이 눈에 덮이면 비로소 나무의 존재가 드러난다. 가지마다 새들이 모여 열매를 먹는다. 배고픈 새들을 위해 1년 내내 외로움 속에서 견딘 나무의 영혼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무는 빛 바랜 갈색 열매를 매달고 쓸쓸히 서 있다. 겨우내 눈이 오지 않으니 새들도 오지 않았다. 다른 먹이를 찾을 수 있으니 맛 없는 열매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나무 아래 서서 가만히 밑동을 쓰다듬는다. 봐, 첫눈이야. 눈이 깊게 쌓이면 새들이 다 모여들 거야. 첫눈이 와서 좋다. 곧 인간의 마을이 하얗게 변하고 멀구슬나무에 모여든 새소리도 따뜻할 것이다.

곽재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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