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르누아르 ‘책 읽는 소녀’

입력 : 2021-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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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책 읽는 소녀’, 1890년경, 캔버스에 유채, 이건희 컬렉션.

삼성그룹이 최근 고(故) 이건희 회장이 소장하던 유명 미술품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기증한 작품은 6월부터 대중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년)가 그린 <책 읽는 소녀>도 있다. 풍성한 꽃이 담긴 화병을 배경으로 꽃 장식이 있는 모자를 쓴 긴 머리카락의 여인이 책을 읽으며 편안하게 앉아 있다. 마치 꿈속 한 장면인 양 뿌연 장밋빛 안개에 싸여 있는 듯한 그림이다.

르누아르는 행복을 그리는 화가였다. 그의 그림 속 인물 중에는 생활비에 쪼들리는 가난한 노동자같이 불운한 상황에 놓여 유복하지 않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이들은 한결같게도 고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가까운 동료는 종종 그의 그림을 보며 현실감이 없다고 평가했는데 그때마다 “현실도 고달픈데 그림마저 고달프게 묘사할 순 없지 않은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그림은 화가로서 신념이 반영된 결과였다. 작품 속 인물이 지금은 힘겹고 슬플지라도 먼 훗날에는 어느 멋진 젊은 날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치를 서로 비교하기 어려운 이건희 소장품 중에서 <책 읽는 소녀>를 골라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모습이 필자 또래 여성에게는 익숙하면서도 특별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책 읽는 소녀상’이 학교마다 세워져 있었던 것 같다. 금붕어를 구경하러 연못으로 가면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격언이 새겨진 받침대 위로 르누아르 그림에서 본 듯한 소녀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외국 애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피아노 배울 때 학원에 들고 다니던 네모난 가방 위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자매가 판화로 찍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도 르누아르의 작품이었다.

환한 빛, 야외용 모자, 천진난만한 표정, 이 세 요소가 결합한 르누아르의 소녀는 비현실적으로 사랑스럽다. 복숭아색 뺨에 긴 머리카락, 잔잔한 꽃무늬가 있는 원피스와 리본이 달린 구두도 좋았지만,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머리 위에 사뿐히 놓여 화사한 빛을 반사하는 이국적인 모자다.

프랑스에 가보기 전부터 <책 읽는 소녀>가 쓴 모자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래서 마치 부적처럼 쓰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 같은 그 프랑스식 모자를 사서 집에 두고 있다. 사실 그 모자를 들고 외출해본 적은 있어도 쓴 채 활보한 적은 없다. 모자의 화려한 장식이 평소 내 옷차림과 비교해 너무 튀는 것 같아 지금도 쓸 용기를 잘 내지 못한다. 다만 가끔 집안 발코니 의자에 앉아 독서할 때 모자를 써보곤 한다. 어쩌면 그림에 등장한 외국 소녀가 행복해하는 그 모습 때문에 훗날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게 됐고, 지금껏 내 인생이 여기까지 흘러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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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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