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어른을 닮은 그림 속 아이들

입력 : 2021-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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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고양이에게 춤을 가르치는 아이들’ 1665∼1668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아이가 좋아서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는 걸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아이의 표정은 행복하고 평화롭다. 놀이를 하고 있을 때나 자그마한 것을 창조하느라 온통 마음이 가 있는 아이를 보면 흐뭇하지 않은가.”

이것은 1762년 교육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어린이를 묘사한 글이다. 어린이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선 안된다고 강조하며 이같은 말도 했다. “한포기의 풀이 싱싱하게 자라려면 따스한 햇볕이 필요하듯 한 인간이 건전하게 성장하려면 칭찬이라는 햇살이 필요하다.”

아동이라는 존재를 각별하게 인식하고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주옥같은 어록을 남긴 루소.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과 애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훗날 고백한다.

유럽의 옛 화가들은 이중 잣대로 작품 속 어린이를 그렸던 것 같다.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 주로 보았던 올록볼록한 몸집과 오동통한 얼굴의 어여쁜 아기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를 나타낸 것이다. 현실 속 어린이는 사랑스럽거나 천진난만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냥 어른을 작게 줄였을 뿐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얀 스테인(1626∼1679년)이 그린 <고양이에게 춤을 가르치는 아이들>을 보면 모두 몸은 어린이 같은데 얼굴은 어른처럼 보인다. 고양이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억지로 춤을 추게 하는 등장인물들은 심술궂은 장난을 하면서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마냥 즐거워한다. 맨 오른쪽 소녀는 손에 담배 파이프를 들고 어른 흉내를 내기까지 한다.

아동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보편화한 것은 18세기 무렵이고, 그 이전에는 아이들을 미래의 희망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이의 놀이나 실수가 창의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저 매사에 부주의하고 버릇이 없기 때문에 엄하게 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이들은 조금도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고 일상 속에서 어른과 구분 없이 온갖 잡일을 도와야 했다. 그리고 아홉살쯤 되면 아이들은 집안일에 보탬이 되도록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 왕실이나 귀족 집안의 어린이는 일은 하지 않았어도 어른의 역할이 미리 덧씌워져 자유롭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얀 스테인의 그림에선 벽에 뚫린 창으로 남자 어른이 아이들을 꾸짖고 있다. 고양이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고 말리거나, 동물과 교감하는 삶의 중요성을 말해줬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하릴없이 시끄럽게 군다고 잔소리하고 있지 않을까. 힘이 강한 어른은 약자인 아이를 함부로 대하고, 그런 어른을 보고 배운 아이들은 동물에게 똑같이 행동한다. 본래 심각한 의미 없이 흥겨운 장면을 그린 그림일 수 있건만,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고 아이를 학대하거나 동물을 죽이는 사건·사고가 많아지는 이때라 그런지 이중적으로 느껴진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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